어떤 사람들에겐 긴 밤도 짧은 한순간이다.
―네가 조선말로 옮겨서 보낸 모파상의 책도 읽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여자의 일생이 어찌 그리 한 남자에 의해 불행하며 그리도 허망이 끝나는고. 바다 건너 세상에도 여자로 태어난 것은 괴로움인 것 같더구나.
―그곳이라고 남녀가 평등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불과 십여 년 전까지 여자는 카페에 드나들 수도 없었다 합니다. 지금도 남자는 카페 안에 들어가 앉을 수 있으나 여자는 테라스에만 앉을 수 있지요. 여러 인종이 모여 살기 때문인지 조선에는 없는 인종 차별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조선에는 없는 관용이 있었습니다.
―관용이라?
―각기 다른 생각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통했습니다. 내가 다른 생각을 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존중해주는 마음 같은 거지요. 파리 시민은 오히려 내 생각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는 듯했습니다. 그것이 에펠탑이나 병원을 짓게 하고 백화점이나 시장을 탄생시키고 의사나 철학자를 키우고 그림을 그리게 하고 글을 쓰게 하는 듯했습니다.
―다른 세상에 나가보니 조선이 가장 먼저 취해야 할 것은 무엇인 것 같더냐?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깨우치는 일입니다. 왕비가 시름이 담긴 깊은 숨을 내쉬었다.
―누구에게나 배울 수 있는 기회를 터주는 것이 급선무라 여겨졌습니다. 우선은 글을 모르는 아이들이 없어야겠지요. 그것이 최소한의 소통입니다. 조선과는 다른 세상으로 나가 다른 문물을 보고 듣고 느끼고 배워 와서 조선이 흐르는 물이 되는 것, 그것이 조선을 새롭게 하고 튼튼하게 하는 기반이 되어 줄 것이라 여겨집니다.
참으로 이상적인 얘기다, 왕비가 몸을 뒤척이며 다시 한 번 깊은 숨을 내쉬었다.
―홍종우는 파리에서 어떤 생활을 했더냐?
―법국에서도 조선 옷을 벗지 않고 전하의 어진을 품속에 넣어 가지고 다니며 늘 조선에 대한 충정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법국 사람들에게 조선은 미지의 땅입니다. 그들에게 조선을 일깨우려고 무진 마음을 쓰곤 했지요.
―전하의 어진을 품고 다녔느냐?
―예. 마음이 흐려질 때면 꺼내 본다고 하였습니다. 리진은 홍종우가 대원군의 초상화도 지니고 다녔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파리를 떠날 때 리진을 찾아와 왕의 어진과 대원군의 초상화를 리진에게 주고 가려다가 거절당하자 얼굴이 붉어졌던 홍종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와는 어찌 지냈느냐?
―조선 책을 법국말로 옮기는 일을 도왔습니다.
―그뿐이냐?
―예.
―그가 상소를 올렸느니라. 법국의 공사가 조선 궁중의 무희를 취한 일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적어 올렸어. 난처할 지경으로 상소의 내용엔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홍종우가? 자신이 조선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리진은 홍종우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가슴이 짓눌리는 것 같은 억압의 정체를 한순간에 깨달았다.
―법국에서 어떤 때에 가장 외로웠느냐?
―제가 누구인지 알고 싶을 때였습니다.
―그래. 네가 누구 같더냐?
―모르겠습니다. 먼지 같고 풀 같고 구름 같고….
―춤을 출 때 네 모습이 그러니라. 먼지 같고 풀 같고 구름 같지. 종내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나도 너도 아무것도 아닐 것이야.
리진은 슬며시 고개를 옆으로 돌려 보았다. 어느새 왕비가 잠이 들어 있었다. 리진은 금침 속에서 몸을 반쯤 일으켜 이마에 손을 얹은 채 고단하게 잠이 든 왕비를 내려다보았다. 왕비의 잠이 깊어졌을 때 리진은 이마 위의 왕비의 손을 금침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