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후노(前壯後老)’. 2006년 지식인 사회를 요즘 유행하는 방식을 본떠 사자성어(四字成語)로 표현하면 이렇게 될 것 같다. 전반기에는 40~50대 장년(壯年) 지식인들이 활발한 모습을 보였고, 후반기에는 70세 전후의 원로(元老) 지식인들이 전면에 부상했기 때문이다.

올 상반기에 주목 받은 지식인들의 활동은 좌파에서는 ‘좋은정책포럼’ 출범, 우파에서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출간이었다. ‘지속 가능한 진보’ ‘한국식 제3의 길’을 내건 좋은정책포럼의 핵심은 임혁백(고려대) 김형기(경북대) 김호기(연세대) 교수 등 40대 후반~50대 전반의 좌파 학자들이다. 이들은 1월 중순 창립 이후 잇단 심포지엄을 통해 종래의 이념 중시에서 벗어나 국가 운영의 실질적 대안을 찾기 위해 고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주역은 박지향·이영훈(서울대) 김일영(성균관대) 교수 등 역시 40대 후반~50대 전반의 우파 학자들이다. 이들은 ‘386’들의 역사 인식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해방전후사의 인식’에 담겨 있는 민족·민중 지상주의를 해독(解毒)하기 위해 학계의 역량을 모아 호평을 받았다.

그런데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대학 강단에서 은퇴한 원로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좌파에서는 계간지 ‘창작과비평’의 편집인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 우파에서는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설립자 안병직(서울대) 명예교수가 대표적이다. 민간통일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백 교수는 우파 중진·원로 지식인들의 ‘선진화론’을 실명으로 공격했고, 뉴라이트재단 이사장인 안 교수는 백 교수의 ‘분단체제론’을 정면 비판했다. 두 사람은 또 강연과 인터뷰 등을 통해서 왕성한 사회적 발언을 쏟아냈다.

이런 상황 전개는 지식인 사회의 분위기를 변화시켰다. 좋은정책포럼과 뉴라이트 지식인들은 ‘한국 사회, 어디로 가야 하나’라는 주제로 공동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선의의 경쟁을 다짐했다. 그런데 원로지식인들이 주목 받으면서 ‘선진화세력’과 ‘통일세력’이 벌이는 사상전의 양상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승부가 될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런 양상은 점점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생산적 대화와 토론을 중시하는 장년들이 뒤로 물러서고 좌·우 대결을 강조하는 원로들이 지식인 사회의 담론(談論)을 주도하는 양상은 우리 사회의 긴 앞날을 생각할 때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 같다. 지금은 냉전과 분단, 산업화와 민주화의 대립이 아니라 정보화와 전(全)지구화가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시대다. 최근 우리 사회의 진로와 관련하여 제기되고 있는 시장과 국가의 조화, 교육·복지·노동 개혁, 남북·대외관계의 재정비, 국민의식의 선진화 등 많은 과제들은 21세기적 감각을 요구한다. 박진감 넘치는 미래 지향적 토론과 논쟁을 위해서는 오늘의 세계 흐름을 읽고 있는 현장의 지식인들이 주역이 되어야 한다.

물론 원로 지식인들의 노익장(老益壯)을 탓할 이유는 없다. 진짜 문제는 그들에 가려서 제 역할을 못하는 장년 지식인들이다. 한참 시대와 씨름하며 논쟁의 중심에 서야 할 학자들이 “명품(名品) 노병(老兵)들 때문에 지질리고 주눅이 든다”고 말해서는 곤란하다. 그 명품 노병들은 30대부터 뚜렷한 문제의식을 갖고 담론과 이론을 발전시키며 학계와 여론을 주도했다. 한국 사회의 나아갈 길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에 40~50대 장년 지식인들이 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