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삼아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시물보다는 ‘레이블’에 눈이 먼저 간다는 말을 하곤 한다. 이따금 사무실에서 나와 전시실을 돌아보면 전시 안내문 앞에 모여 무언가를 적는 데 열중인 학생들을 만난다. 초등학생에서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역시 학생(學生)이구나” 할 정도다.

대학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이벤트는 답사였다. 어떤 선배에게 이끌려 예비답사에 가게 된 것이 연이 되어 이후 몇 년간 답사 준비를 하게 되었고, 유명하다고 하는 문화유적은 한번씩 훑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답사를 준비하면서 주워 모은 지식을 통해 어려운 용어로 가득 찬 문화재 표지판을 보고도 이해할 정도가 되었고, 스스로도 꽤나 우쭐해했다.

몇 년 후, 군대를 다녀오고 얼마 안 됐을 무렵, 답사를 함께 다녔던 선배는 내게 2박3일의 지리산 산행을 제안했다. 산에 이따금 오르기는 해봤어도 2박3일의 등산은 처음이었다. 화엄사를 지나친 채, 하루 종일, 그리고 그 다음날 한나절 내내 정신없이 걸어 산장에 도착하니 지리산 자락을 휘감은 구름이 저녁노을에 붉게 물들고 있었다.

풍경에 취해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선배가 말을 걸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꽤나 많은 곳을 다니고 많은 것을 배웠지. 우리가 배운 것은 어쩌면 사전에 더 잘 나와 있을지 몰라.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광경과 이 느낌은 어디에도 없는 우리만 가질 수 있는 것 같아.” 순간 지금까지 내 대부분의 여행은 발품을 팔며 책을 읽은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내판에 모여 있는 학생들이여! ‘문자(文字)의 옥(獄)’에서 뛰쳐나와 눈을 떠요.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당신들만의 유물을 가져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