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베를린특파원

베를린 시내의 동쪽 외곽에 있는 '슈타지문서 관리청' 건물. 주변 풍경이 낡고 스산했다. 안내인은 "과거 동독 시절에는 직경 1km 안에 공산당 지도부와 주요권력기관이 밀집된 핵심 지역"이라고 설명했다. 이 구동독 건물 안에서 '동독 시절의 잔재청산 사례'를 주제로 이틀간 세미나가 열렸다.

두 개의 장면만 발췌하겠다. 첫날 발표자는 베를린시 검찰총장이었던 크리스토프 새프겐씨. 동독 정권의 불법 사례에 대해 사법적 처리를 총지휘한 인물이다. 이 은퇴한 칠순 노인은 '추억' 얘기로 시작했다.

"1961년 동독 정권이 베를린 장벽을 세우자, 서독 정부는 '이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용납하지도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잘츠기터(독일 중북부의 소도시)에 중앙조사처(이하 잘츠기터로 칭함)가 설치됐다. 동독 정권의 인권 탄압 사례를 수집해 나중에라도 형사소추를 하겠다는 의지였다."

'잘츠기터'는 전담직원이 2명, 가장 많았을 때도 7명. 연간 예산 37만 마르크(1억8000만 원)에 불과했다. 정말 '콩알만했다'. 법적 집행 능력도 부여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동독 정권을 가장 예민하게 만든 것이 바로 이 '콩알'이었다.

"정치적 상징성이 컸지만 구체적인 효과도 있었다. 동독 국경수비대들이 탈주자를 향해 조준할 때 다시 생각하게 했고, 수감된 동독정치범들을 고문에서 얼마간 지켜줬다."

동방정책(동독화해정책)으로 동서독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동독정권은 줄곧 이 기구의 폐쇄를 요구해왔다. 서독의 사민당이나 지식인들도 "냉전의 잔재"라며 동조했다. 동독 체제에 대한 비판은 "평화와 긴장 완화를 해치는 것"이었고, 동독을 미화해야만 "진보적"이라는 말을 들었고, 동독 공산당 서기장 호네커를 "친근한 이웃 아저씨"로 대하는 분위기가 거리를 휩쓸고 있었다. 어디서 본 듯한 익숙한 풍경이다.

결국 '잘츠기터'의 연방 예산이 끊겼다. 베를린 장벽의 현장에서는 여전히 탈주자들이 피를 흘렸다. "되돌아보면 서독 정치사에서 정말 부끄러웠던 사건이다. 일부 주(州)에서 예산을 갹출해 '잘츠기터'는 통일될 때까지 겨우 존속될 수는 있었다."

물론 '잘츠기터'가 동독 주민들의 고통을 모두 막지는 못했다. 그러나 존재 의의는 충분했다. 분단 기간 베를린 장벽을 넘다가 사살된 수만 256명. 자유와 인권탄압 사례들은 4만여 건이 넘는다. 통일 뒤 10 만여 명이 조사대상자로 소환됐다. '잘츠기터'는 그런 범죄의 실상을 수집해 증거로 남겨놓았던 것이다.

다음날 발표자는 통일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마르쿠스 빌케 박사. 수감된 동독 지식인과 대학생을 구하기 위해 현장을 뛰었던 경력도 있다. 한국에서 온 통일부 관계자가 질문했다.

―햇볕정책을 아는가? 요즘 정부당국도 이에 대해 고민 중이다.

"내가 알기로 한국의 햇볕정책은 빌리 브란트 서독총리의 '동방정책'에서 착안했다. 그러나 서로 많이 다르다. 브란트 시절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핵무기가 서독에 배치돼 있었기 때문이다. 확고한 안보 위에서 해빙 무드를 열었다. 그런 바탕이 없는 '햇볕'은 지극히 위험한 수단이다. 이제 김정일이 핵을 가졌다. 중국의 통제권에서도 벗어난 것 같다. '민주와 자유체제로의 통일'을 말하는 것이라면, 한국은 지금 몹시 어려운 상황이다."

현 정권은 제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느라 집안 싸움 중인데, 이런 '먼 얘기'가 귀에 들어올 리가 만무하다.

(최보식 · 베를린특파원 congchi@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