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해남 화산 사람이 있었다. 그는 글자를 몰라 농기구를 팔면서 어렵사리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1. 어느 날이었다. 해남 대흥사 상원루 아래에서 잠시 짐을 내려놓고 쉬고 있었다. 때 마침 취여(醉如) 삼우(三愚) 대사(1622~1684)가 사람들을 모아 놓고 화엄경의 뜻을 풀이하고 있었다. 몰래 엿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무엇인가를 갑자기 깨달았다. 등에 지고 왔던 농기구를 옆에 있던 동료에게 넘겨주고는 곧바로 상원루로 올라갔다. 그리고 삼우 선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눈물을 줄줄 흘렸다. "저에게 불경 공부를 하게 해주십시요." 삼우 선사가 그의 청을 받아주었다. 주위 청중들이 씻은 듯 조용하였다. 그는 매일 밤 솔방울을 주워서 불을 밝혔다. 그리고 밤새도록 글을 읽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자 다른 사람들을 앞서가게 되었다.
#2. 대흥사에서는 항상 불경의 뜻을 풀이하는 강론이 열렸다. 당시 북방에서 가장 이름난 월저(月渚) 도안(道安) 선사(1638~1715)가 대흥사를 찾아왔다. 선종의 뜻을 놓고 두 고승은 생각을 주고 받았다. 그가 스스로 마련했던 강론의 자리를 도안선사에게 양보하고 물러났다. 대중들이 한사코 만류했지만, 그는 웃으면서 방으로 들어가 도안 선사의 강론이 끝날 때까지 벽을 바라보고 참선했다. 대중들은 법회가 끝난 다음 그에게 더욱 뜨거운 갈채를 보냈다. 도안 대사는 북쪽으로 돌아가 "남쪽에 이르러 육신의 보살을 보았노라"고 그의 학덕을 칭송했다. 도안 대사는 화엄경의 한글화 작업을 완수한 화엄경의 권위 있는 승려였다.
도안 대사가 그렇게 학덕을 칭송했던 이가 바로 화악(華嶽) 문신(文信) 대사(1626~1707)이다. 대흥사의 4대 종사이다. 글을 몰라 출발은 늦었지만,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로 취여 삼우 대사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삼우 문하의 수많은 제자들중 선택을 받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화악은 실력과 학덕으로 당당하게 스승의 자리를 물려받았던 것이었다.
최근까지 전남 강진 다산기념관에서는 다산유물특별전이 열렸다. 그 중 관심을 끈 것이 있었다. 바로 강진에 유배 중이던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 선생이 화악 문신 대사에 대해 쓴 글이었다. 대흥사 혜장(慧藏·1772~1811) 스님이 화악 문신에 대한 탑명(塔銘)을 요청해서였다.
'옛적 화악 대사가 어렸을 때 글을 알지 못했다. 농기구를 팔아 살았다. 하루 아침 농기구 팔던 그 업을 버리고 책을 받아 들었다. 마침내 선종(禪宗)을 이루었다.' 세월을 뛰어넘어서도 인간의 향기가 전해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