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영

올해 들어 미국과 유럽에 출장을 다녀왔다. 흥미로운 사실은 해외 출장 기간에 돈 씀씀이에 대한 부담이 줄었음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거 출장 때마다 자린고비처럼 지내야 했던 기억도 점차 희미해진다. 현지의 체감 물가는 원화 강세만으로 설명되는 것 이상이다. 예컨대, 지난달 미국 시애틀에서 세 사람분의 스타벅스 커피 값으로 지불한 금액이 원화 기준 대략 7000원을 넘지 않은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왜 그럴까? 물가란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원리의 작동 결과이다. 판매자가 제아무리 비싸게 팔고자 해도, 구매자가 없다면 공염불이다. 구매자가 판매자의 호가(呼價)를 실제로 지불해 주어야만 가격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스타벅스 커피 값은 구매자의 지불 의향 가격인 셈이고, 높은 물가는 구매자들의 부(富)가 지불 능력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수준에 도달해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과거에 비해 여유로워진 필자의 출장비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유해야 일부라도 설명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 부유하다는 것일까? 세계은행이 조사한 2005년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 4만2000달러, 스위스 3만7000달러, 영국 3만3000달러, 한국 2만2000달러인 것을 보면, 우리가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더 부유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결국 우리나라의 높은 물가는, 현재 상당수 국민들이 소득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소비에 할애하기 때문이 아닌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 아무리 소비가 미덕인 사회라 해도 이러한 현실은 왠지 이상하고 걱정스럽다.

한 가지 설명은 가능하다. 새로운 저축 개념이 소비 패턴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지금 벌어들이는 소득의 일부를 쌓아두는 것이 전통적인 저축이라면, 이제는 시세 차익을 주는 자산 보유가 새로운 저축이 된 것 같다. 적정 자본 이득을 보장한다는 자산을 보유하는 한, 지금 당장의 소비를 줄여야 할 이유는 별로 없다. 예컨대, 아파트 가격이 적정 수준 올라준다고 확실히 믿는다면, 당장 애들 학원비를 줄여야 할 이유도, 노후를 걱정할 이유도 없다. 미래 부동산 가격에 대한 확신이 과소비와 고물가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부동산 불패(不敗) 신화가 계속돼 오늘의 빈 지갑이 내일 반드시 채워진다면야, 오늘의 소비가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부동산 불패 신화가 건재하는 한, 자금의 부동산 쏠림 현상과 건전한 생산적 투자의 위축을 피할 길이 없다. 결국 미래의 부(富)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 '생산 없는 소비'는 미래 우리 경제의 성장동력을 담보로 하는 도박인 셈이다. 언젠가 부동산 불패라는 찻잔 속의 태풍이 찻잔인 우리 경제를 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시점에서도 내일 우리의 지갑이 채워질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부동산 문제는 정책당국에 계륵(鷄肋)과 같은 것이리라. 어려운 문제라서 그런지 매번 내놓은 부동산 정책은 결과적으로 변죽을 울렸다고 평가해야 할 것 같다. 불황을 말하지만, 부동산 앞엔 매번 돈줄이 길다. IMF 금융 위기 극복을 위해 부동산 경기 부양이라는 너무 쉬운 길을 택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나라 경제가 부동산 저축에 포획된 상황에서 구태의연한 방법이 발상의 전환을 가져올 리 없다. 부동산 저축을 통해 불안한 소비를 즐기기엔, 경쟁국들의 행보도 너무 빠르다. 더 늦기 전에 정책 당국은 금리의 점진적 조정을 신중히 검토하기 바란다.
(이한영·중앙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