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는 조금 독특했다. 24일 밤 어묵을 안주로 내놓은 신사동의 한 술집. 7명의 젊은 영화감독이 한 사람을 중심으로 둘러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가운데에는 80년대 한국영화를 상징하는 이름, 배창호(53). 그 주변엔 2000년대를 대표하는 이름들이다. 1300만 관객을 모은 ‘괴물’의 봉준호, ‘가을로’ 개봉 전날임에도 두 말 않고 달려온 김대승, “올해의 영화”라는 칭찬을 들은 ‘가족의 탄생’의 김태용, ‘광식이 동생 광태’의 김현석, ‘여자, 정혜’의 이윤기,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의 용이, 그리고 개봉을 준비 중인 ‘사과’의 강이관. 예상 못한 후배들의 환대에 배 감독 뺨은 홍옥처럼 붉어졌다.

배창호 감독이 먼저 내민 술잔에 후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오른쪽 배 감독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강이관 김현석 용이 이윤기 감독.

그의 뺨이 변하기 2시간 전 소극장 압구정스폰지에서는 배 감독의 17번째 장편 '길'(11월 2일 시네코아 등 3개 극장 개봉) 시사회가 열렸다. '길'은 요즘 한국 영화 평균 제작비의 9분의 1에 불과한 5억원으로 만들어진 작은 영화. 장터를 떠도는 70년대 대장장이 태석을 주인공으로 오해와 진실, 미움과 그리움의 아이러니를 남도의 아름다운 길에 담아낸 성찰적 로드 무비다. '러브 스토리'(1996)처럼 그가 주연까지 맡은 작품. 완성은 벌써 2년 전이었다.

하지만 진지한 사유보다 감각과 흥행을 우선하는 최근 극장 환경에서 작가주의 영화 '길'이 스크린을 잡기란 요령부득의 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작은 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스폰지가 배급을 결정했고, 이 영화사 조성규 대표가 소박한 이벤트 하나를 꾸몄다. 배 감독에게는 알리지 않고 충무로의 젊은 감독들을 시사회에 초대한 것. 100석도 채 안 되는 극장에서 20여명 남짓한 영화인들이 배 감독이 먼저 밟은 '길'을 따라 걸었다. 요즘 요란한 'VIP 시사회'처럼 수십대의 카메라도, 스타들도 없었지만 극장 안은 뜨거웠다.

자연스럽게 술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2000년 이후 충무로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끈을 발견하기란 극히 드문 일. 누구 탓을 하기도 어렵지만 "세대 단절"이란 모진 소리까지 나오는 지경이다. 배 감독도 요즘 젊은 감독들과의 편안한 자리가 처음이라고 했다.

대부분 첫 대면이었던 젊은 감독들은 배창호라는 고유명사가 자신의 영화 인생에 남긴 흔적을 앞다퉈 고백했다. 배 감독 대표작 중 하나인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에 대해 이윤기 감독은 "100번을 넘게 봤다"고 '자수'했고, 김태용 감독은 "내 인생의 영화"라고 '간증' 했다. 맞은 편 봉준호 감독은 배 감독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1982)을 시작으로 그의 작품과 장면들을 거의 서지학(書誌學)수준으로 열거하다가 "스토커 아니냐"는 동료 감독의 농담 섞인 핀잔을 받기도 했다. 흥행과 스타일 모두를 성취했던 그의 영화에 대해 김현석 감독은 "지금의 강우석+박찬욱"이라고까지 비유했다. 물론 면전이 아니라 동료들끼리만 있던 나중의 자리에서이기는 했지만.

굳어있던 처음 분위기는 선배의 옛 이야기와 후배들의 재치로 금방 화기애애해졌다. 편집을 마친 '기쁜 우리 젊은 날'을 본 제작자 이태원 사장(태흥영화사)이 "배 감독, 베드신은 고사하고, 어떻게 살짝 안아주는 장면 하나라도 넣으면 안되겠냐"고 부탁했다는 일화에 후배들이 뒤집어졌고, 요즘 젊은 관객들은 배우 이미숙을 '스캔들'(2003)로 데뷔한 신인으로 안다는 이야기엔 선배가 뒤집어졌다. 그 술자리에서 한국 영화사 이면의 많은 빈틈이 메워졌고, 과거와 현재를 잇는 끈은 도타워졌다.

배 감독은 문득 얼마 전 제 11회 부산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학교 교수를 맡았던 경험을 떠올렸다. 교수진 중에 선배로는 교장을 맡았던 임권택 감독이 유일하더라는 것. 그는 "모시고 다닐 선배가 있다는 게 그렇게 좋더라"면서 "미약하지만 우리 세대가 가지고 있는 경험이나 노하우가 있을 텐데 그 전통이 계승되지 않는다는 게 무척 안타깝다"고 했다. 그러고는 후배들의 근황을 일일이 물으며, "오늘은 그 어떤 VIP시사보다 값진 자리"라며 고마워했다. 시간은 화요일에서 수요일로 바뀐 지 오래였고, 감독들의 뺨은 너나없이 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