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보〉(120~132)=한 판 바둑의 도정(道程)은 멀고도 험하다. 그 과정에서 한때의 우세는 믿을 게 못 된다. 새카맣게 떨어뜨렸다고 생각했던 상대가 거리를 좁혀와 어느새 어깨 곁에서 달리기 일쑤다. 바둑이건 마라톤이건 골인 테이프를 끊는 순간 승부가 결정된다. 심지어 스타디움에 들어온 뒤에도 순위가 바뀌지 않던가.

초반 '횡재'로 큰 우세를 지켜왔던 흑이 바짝 쫓기고 있다. 120은 부분적으론 121이 옳지만 참고도 2, 4가 겁난다. 백 △ 두 점이 고립되는 손실이 더 크기 때문. 120은 하중앙에 집 칸이라도 마련하자는 뜻이다. 127이 문제수. '가'의 빵때림이 최대처였다. 그랬으면 백 '나'를 생략할 수 없는데 그때 127이었으면 상황 끝이었다는 중론.

그 수순을 생략하고 127부터 둔 순간 128이 기민해 순식간에 미세해졌다. 멀리 처져 보이지도 않던 상대가 바짝 붙은 채 콧김을 내뿜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오버페이스였을까? 순간 백에게서 추격의 보람에 찬물을 끼얹는 완착이 등장했다. 당연해 보이는 132가 문제의 한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