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완구 회장의 접견실에는 정도준이 쓴 '용비어천가2장'이 걸려 있다

미국 오리건 주립대학교 안에 있는 '슈나이처 박물관'에서는 오는 20일 한국 서예가인 정도준의 기획전을 시작한다. 작년 1월부터 올해 7월까지는 한국 고미술 특별전을 했고, 최근 '한국의 십장생(Ten Symbols of Longevity)'이라는 도록을 만들어 미국 전역의 미술관·박물관과 대학에 보내기도 했다. 미국의 박물관이 한국미술 알리기에 왜 이렇게 열심일까? 그 배경엔 허완구(70) ㈜승산 회장이 있다. 한국관을 짓고 한국 전시를 하는 조건으로 그가 오리건 주립대에 150만달러(약 15억원)를 기증했기 때문이다.

허 회장은 소문난 고미술 수집가다. 서울 서초동에 있는 회의실엔 청전 이상범의 대작 산수화가, 접견실엔 정도준이 쓴 '용비어천가 2장'이 걸려 있다. 회장실에 들어가니 고미술 관련 서적, 경매 도록들도 보인다. 93년 오리건주에 '파 웨스트(Far West)'라는 자회사를 만든 뒤 출장 갈 때마다 슈나이처 박물관에 드나든 건 당연했다.

"박물관에 중국관, 일본관은 버젓이 있는데 한국 작품은 일본관 구석에 몇 점만 빽빽하게 늘어져 있는 거예요. 제가 안타까워하니까 대학측에서 '50만달러(약 5억원)를 기증하면 한국관을 따로 지어주겠다'고 제안했어요."

흔쾌히 50만달러를 보냈다. 이에 따라 작년 1월 '허완구 윙(Wing)'이란 이름의 한국관이 완공됐다. 올해 초 허 회장은 대학측에 다시 100만달러(약 10억원)를 더 기증했다. 한국미술을 연구하고 알리는 데 쓰라는 조건이었다. 대학 측은 100만달러에서 나오는 연수익 6만~7만달러로 매년 한국미술 특별전을 열겠다고 하고, 그 첫 전시로 정도준전을 기획했다.

"외국 출장 갈 때면 그 지역 박물관에 가보는데, 우리 문화재들이 얼마나 많은지 보면 놀랍습니다. 겸재의 금강산도부터 임금이 타고 다니던 가마인 어가(御駕)까지, 국내에서도 보기 어려운 것들이 어떻게 다 바깥에 나가 있는지 몰라요. 변변한 한국전시실이라도 있으면 그런 게 외국인들에게 제대로 보여지기라도 할 텐데, 일본관 구석 같은 데 초라하게 놓인 것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아파요."

허 회장은 고(故) 구인회 회장과 함께 LG그룹을 세운 고(故) 허만정씨의 12남매 중 5남이다. 다른 형제들도 대부분 기업인이지만, 유독 허 회장만이 미술 애호가라 집안에 내려오는 미술품은 다 그의 몫이다. 이번 슈나이처 박물관에서 전시를 하는 서예가 정도준씨는 허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3만석지기 부자'였던 조부가 남긴 글을 정도준의 글씨로 써서 사무실에 걸어 놓았다. "우리 집안 사람이 가난하지 않음을 이야기하나, 주위에 가난한 이가 가난하지 않은 이보다 더 많다… 모자람을 걱정 말고 고르지 못함을 걱정하라"는 내용이다. 허 회장은 "돈을 번 만큼 사회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라는 이 가르침을 매일 새기며 산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