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세계은행이 '동아시아의 르네상스'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1993년 '동아시아의 기적' 이후 13년 만에 나온 아시아 경제 종합보고서다. 세계은행은 이 보고서에서 동아시아 지역이 1997년의 금융위기를 딛고 일어나 다시 경쟁력 있고 혁신적인 경제를 창출해냈다고 평가했다. 동아시아 경제모델 복권(復權) 선언인 셈이다.
세계은행이 이 보고서를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 연례총회가 열린 싱가포르에서 발표한 것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싱가포르야말로 '르네상스'의 말 뜻 그대로 동아시아 경제의 '재생(再生)'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가장 생생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한국·태국·인도네시아와는 달리 외환위기를 겪지 않았다. 그러나 동아시아 지역을 덮친 폭풍우에서 무사할 수는 없었다. 1998년과 2001년 두 차례나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당시 세계경제 전문가들은 중개무역으로 커온 싱가포르 경제의 태생적 한계가 드러났다고 했다. 5년 전 싱가포르는 외환위기를 겪은 한국보다 앞날이 더 어두워 보였다.
그랬던 싱가포르가 지금은 21세기 지식기반 경제의 우등생으로 불리고 있다. 미국 MIT 등 세계 최고 대학들의 분교를 유치해 6만명이 넘는 외국 유학생을 끌어들이고 있다. 의료분야도 연간 30만명의 외국 환자를 받아들일 정도로 세계적인 수준이다. 지식기반 서비스 산업에서 싱가포르 경제의 살 길을 찾아 과감하게 문을 열고 규제를 푼 결과다.
싱가포르 교육부는 최근 학생들의 영어실력을 획기적으로 높이기 위한 새로운 교육정책을 발표했다. 특히 말하기와 쓰기 교육에 역점을 둬 대부분의 학생들이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상위 20%는 미국·영국인만큼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도록 한다고 했다. 글로벌 경제시대에 세계 어느 나라의 누구와도 경쟁할 수 있는 인재를 키워내겠다는 것이다.
2004년 8.7%, 2005년 6.4%에 이어 올해는 7.5%에 이르는 높은 경제성장률은 바로 이런 노력의 결실이다. 국민소득 1만6000달러 수준인 한국은 4%대 성장률로 만족해하고 있는데 3만 달러 가까운 싱가포르는 7~8%의 성장률로 뛰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의 4마리 용'이라고 했던 한국·타이완·홍콩·싱가포르 가운데 지금은 싱가포르만 홀로 우뚝 서 있다는 말이 나올 만하다.
그런데도 싱가포르 지도자들은 "경제는 이만 하면 됐다"고 하지 않는다. 리셴룽 총리는 지난 8월 독립기념일 축제를 마감하는 행사에서 "폭풍우가 다시 몰아칠 때를 대비해 여건이 좋고 태양이 빛나고 있을 때 최대한 더 빨리 더 많이 성장해야 한다"고 했다. "경제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의 전제조건"이라고도 했다. 국가 지도자의 이런 '경제 제일' '성장 우선'의 철학이야말로 싱가포르 경제 재생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 핵실험 이후 정부가 필요하다면 경기부양에도 나서겠다고 했다. 아직은 파장이 적은 듯하지만 북핵 사태가 장기화하면 그러지 않아도 어려운 나라 경제가 더 내려앉을 것이란 우려에서다. 그러나 경기부양이라는 말로 정부가 돈을 더 풀어봐야 우리 경제가 기력을 되찾기 어려울 것이다. 기업과 국민들 사이에 '경제 하려는 마음'을 살려낼 수 있는 근본적인 처방이 나와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먼저 국가 지도자의 경제철학과 의지가 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싱가포르는 보여주고 있다.
(김기천 · 논설위원 kck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