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세상이 롤러코스터를 탔다. 크고 작은 핵(核)들이 가슴 안팎으로 터지는 요즘이다.
뜨겁게 울먹였던 숨결을 가라앉히면서 예술의 진수를 가깝게 느끼려면 미술관 탐방이 으뜸이다. 입장료는 5000원도 안 된다. 시집 한 권도 살 수 없고, 영화도 조조가 아니면 어렵고, 연극이나 뮤지컬은 꿈도 못 꿀 작은 돈이지만 미술관은 무한한 영감의 세계를 열어 놓는다.
그림 보고 차 한 잔 곁들이는 것만큼 지적인 데이트도 없다. 더구나 미술관 산책에 10월 상달의 청명한 대기는 황홀함 자체다. 자, 지금 문밖을 나서기만 하면….
물기 머금은 굵은 나뭇가지를 중심으로, 개성이 뚜렷한 동식물이 좌우에서 팔딱거린다. 발톱 끝까지 힘을 단단히 주고 몸을 틀어 나무 아래를 노려보는 꿩에서부터, 반대편에 앉아 있는 독수리의 살기등등한 눈매까지. 거침과 부드러움이 화면에서 대각선으로 교행하는 숨막힌 그림이다.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1843~1897)의 자유분방한 성격과 천재적 기량이 드러난 ‘영모도대련(翎毛圖對聯)’이다. 장승업은 당대 최고의 화원(畵員)이었다. 화원은 궁중 도화서에 소속된 직업화가라 공적인 작품을 생산해냈지만, 조선 말기 들어 이들은 점차 개성적 화풍을 일궈간다.
19세기 중·후반인 조선말기는 근대화와 외세의 간섭으로 사회가 혼란했지만, 문화 또한 그만큼 다채로웠다.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하는 '조선 말기 회화전'(19일~2007년 1월 28일·02-2014-6901)은 이 시기의 회화만 집중 조명하는, 보기 드문 전시다. 리움의 개관 2주년 기념전인데다가, 이 미술관이 하는 첫 고미술전시라 올 가을 미술관 순례 계획을 짤 때 꼭 적어놓을 만하다.
장승업같은 새로운 화풍은 안중식, 조석진, 채용신 등에게 이어졌다. 하지만 이 시기 또 다른 축을 지탱한 건 문인화가(文人畵家)들이었다. 특히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중국의 서화(書畵) 이론을 습득한 뒤 이를 뛰어넘는 조선의 자주적 서화를 만들어내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마침 추사의 타계 150주년을 맞아 이 전시에는 추사의 글씨만 모은 특별실이 마련됐다. 또 그의 그림을 이어 받아 '사의(寫意·사물 겉모양뿐 아니라 속의 뜻을 그림)'를 중시한 조희룡, 허련, 이하응의 회화를 전시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권력의 핵심을 오갔던 정치가이지만, 글과 그림에도 뛰어났다. 특히 난(蘭) 그림에 있어서는 추사도 인정한 대가였다. 이하응의 '괴석묵란도(怪石墨蘭圖·1887)'는 농묵(濃墨)의 난잎과 담묵(淡墨)의 꽃잎이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전시는 유숙의 '홍백매도8곡병'(보물 1199호)과 김정희의 '반야심경첩'(보물 547호) 등 보물 두 점을 포함해 모두 80여 점이 걸린다.
조선 말기 글과 그림이 다채롭게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를 즐기는 관객층이 급격하게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화가들은 과거의 문인화풍에서 눈을 넓혀 새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미감을 만들었고, 이 전시는 그 흐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