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실험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반기문(潘基文) 외교부장관이 차기 유엔사무총장으로 사실상 확정되었다. 과거 냉전시대 한국은 분단국으로 유엔에 가입조차 허용되지 않았는데 이제 한국인이 유엔의 수장이 된 것이다. 9일 소집된 유엔 안보리는 그야말로 진풍경을 연출하였다. 한반도 분단 61년 만에 남측은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하였고, 북측은 유엔 제재의 대상이 되고있다. 변화한 한반도의 현실을 이보다 더 웅변적으로 묘사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자리에서 맡은 바 소임을 잘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유엔 사무총장직은 코피 아난 현 총장이 "지구상에서 가장 불가능한 직"이라고 했을 만큼 힘든 자리다. 1만7000명의 직원과 연간 정규 예산 20억달러, 평화유지활동 예산 48억달러에 달하는 방대한 조직을 관장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무총장은 단순히 사무만 총괄하는 자리가 아니다. 세계를 대변하는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역할도 요구된다. 유엔헌장은 사무총장을 유엔의 최고 행정관으로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 평화와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고 자신이 판단하는 어떠한 사항에 대해서도 안보리의 주의를 환기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세계 평화 유지에 있어 사무총장의 정치적 역할을 폭넓게 인정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무총장은 5개 상임이사국을 비롯한 강대국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192개 회원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약소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등 외교적 수완과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이번 사무총장 선거과정에서 행정가로서 반 장관의 능력에 대해서는 별 의문이 없었으나 그가 과연 정치 지도자로서 비전이나 리더십을 갖추었는지에 대해 우려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반 장관이 앞으로 이러한 우려가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바란다.
유엔헌장은 사무총장이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어떠한 정부나 단체로부터 지시를 구하거나 받아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무총장은 철저히 유엔에만 책임지는 국제공무원이다. 마찬가지로 회원국도 사무총장직의 국제적 성격을 존중하고 직무수행에 영향을 미치려 해서는 안 된다. 민족주의적, 가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한국인들이 특히 유념해야 할 사항이다. 한국은 유엔을 종종 곤경에 빠뜨리는 초강대국 미국의 동맹국이자 북한 핵실험에서 보듯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분쟁의 당사국이다. 이러한 배경은 반 장관의 직무수행에 큰 도전이 될 수 있다. 한국정부도 그가 한국에 특혜를 주거나 한국 입장에 유리하도록 행동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반장관 자신도 인터뷰를 통해 "북한인권 문제 등에 유엔입장에서 대처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이는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반 장관이 갑자기 국적도 없는 외계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국익을 추구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가 세계의 대변인으로서 공정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결국 우리의 장기적 국익과도 부합한다는 사실을 우리 국민들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유엔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유엔은 국제사회에서는 대체할 수 없는 존재다. 전 세계 16개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평화유지활동은 물론, 환경, 인권, 군축, 난민, 개발 등 국경을 초월하는 수많은 문제들의 해결에 유엔은 필수불가결하다. 이번 반 장관의 사무총장 피선을 계기로 우리 젊은이들이 보다 자신감을 가지고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기를 기대한다.
(백진현 ·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국제정치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