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다. 깊다. 좋다. 관객의 마음을 가져간다. 입으로 웃으면서 눈으로 울게 만드는 '라디오 스타'(28일 개봉)의 가장 큰 매력은 그 넉넉함에 있다. '왕의 남자'의 이준익 감독은 삶의 여백을 쓰다듬는 넉넉한 손길로 이 소박한 영화에 특별한 감동을 불어넣었다.
한때 최고 인기를 누렸던 가수 최곤(박중훈)은 인기가 떨어진 지금도 아직 스타라고 굳게 믿는다. 20년 가깝게 그를 돌본 매니저 박민수(안성기)는 최곤이 또다시 폭행으로 사고를 치자 합의금 마련을 위해 강원도 영월의 라디오 DJ 자리를 제안한다. 마지못해 맡은 최곤은 멋대로 진행하지만 솔직한 방송이 오히려 호응을 불러일으킨다.
'라디오 스타' 캐스팅은 충무로가 한국영화 팬들을 위해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선물같다. 영화 밖 이력과 영화 안의 상황이 자주 겹치는 박중훈은 20년 경력 전체의 무게를 실어 연기한다. 지방 방송국 DJ로 처음 인사할 때 "가수왕 최곤입니다"라고 내뱉은 뒤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듯 "88년도"라고 슬쩍 덧붙였던 '퇴물 스타'는 작품 말미에서 "88년도 가수왕 최곤입니다"라고 자연스레 말한다. 철없던 스타가 좌절을 겪으며 현실을 인정하고 성숙해지는 과정을 표현하는 데 집중한 박중훈 연기는 뒤로 갈수록 점점 위력이 강해진다. 공개방송 무대에 서기를 극구 사양했던 이유에 대해 "노래하고 싶어질까 봐"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슬쩍 내뱉는 장면에서조차 그는 아픈 내면을 실어낸다.
이 영화의 안성기는 눈부시다. 그렇게 오랜 세월 연기를 하고도 아직까지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는 캐릭터가 남아 있는 배우를 지켜보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의'자가 겹치면 안 좋다는 PD의 말에 "민주주의의 의의"는 네 번이나 들어간다며 너스레를 떨 때, 비 오는 날 쭈그리고 앉아서 담배 피우며 전화할 때, 그리고 버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최곤의 울음 섞인 목소리를 들으면서 처연한 표정으로 김밥을 꾸역꾸역 먹을 때, 안성기는 무장해제된 관객들 가슴 속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잔뜩 취한 젊은 PD는 최곤에게 "차라리 예전에 은퇴를 했으면 전설로라도 남았을 것"이라며 아프게 찌른다. 이어 박민수에겐 "아저씬 가족도 없어요?"라고 쏘아붙인다. 뻔히 보이는데도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딜레마가 있다. 경쟁과 효율이 추동력인 시대, 그러나 어떤 바보 같은 사람들은 함께 어깨를 겯고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라디오 스타'는 꿈이 클수록 그림자가 짙다는 것을 잘 아는 영화다. 그런데도 감독은 탄식 대신 촛불을 들고 그늘 속으로 또박또박 걸어 들어간다. 세월을 적잖이 흘려 보낸 사람이라면, 촛불 하나로 추위와 어둠이 걷힐 수 없다는 것쯤은 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 그 가녀린 촛불은 충분히 밝고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