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59년 춘삼월에 충북 영동군 삼도봉 근처, 하늘만 빠꼼한 첩첩산중에서 태어났다. 한마디로 촌년이다"라고 말하는 작가 이현수씨. "작가란 작품 뒤에 숨어야 하는데, 개인사를 이렇게 다 까발려야 하느냐"고 항의했지만, 반드시 써야 한다고 했더니, 구성진 가락으로 살아온 날들을 노래했다. "여섯 살 땐가 일곱 살 때 아버지를 따라 대전에 가서 난생처음 영화를 봤다. 그 문화적 충격을 감당할 수 없어서 혼절했다. 손가락을 따고 난리가 났다."

노래는 계속된다. "바다는 수학여행가서 처음 봤다. 옆구리가 뜯기는 느낌이었다. 장터에 약장수나 국극단이 들어오면 꼭 가서 홀린 듯이 보곤 했다. 선생님에게 들켜 출석부 모서리로 맞은 기억이 있다. 이때의 체험이 '신기생뎐'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이현수씨는 만약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실패한 달리기 선수 아니면 식당 주인이 됐을 것"이라고 답했다. "달리기를 좋아했다. 100m와 800m, 넓이뛰기(멀리뛰기)에 소질이 있었다. 달리는 것이 너무 좋아 주로 뛰어다녔다. 출발하기 전의 긴장, 달리는 내 몸의 근육들의 움직임, 빠른 속도로 스쳐가는 바람, 숨이 턱에 차는 느낌, 이런 것들이 다 좋았다."

그러나 그녀는 정식 육상 선수가 되지 못했다. 체육 선생님 말씀이 "넌 체육적으로 생기지 않았잖아"라는 것. "체격 조건에서 밀린다는 거였다. 그 말을 듣고 바로 포기했다. 그때 어찌나 상처를 받았던지 훗날 작가로 등단(1991년)할 때도 비문학적으로 생겼다고 뽑아주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할 정도였다. 내가 오랫동안 무명으로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 달리기의 힘이 아니었나 싶다.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안다. 힘의 안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