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교수들의 '인문학 선언' 이후 인문학의 위기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는 단독 현상이 아니고 급격한 사회적·기술적 변화의 시기에 발생하는 사회제도의 복잡한 변환의 일환이다. 교양의 위기, 문학의 위기, 대학의 위기, 고급 문화의 쇠퇴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범세계적 현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원인 분석과 진단은 심도 있는 다각적 검토를 필요로 하며 간단히 처리할 사안이 아니다.
우리의 경우 인문학도들의 위기감은 인문학과 지원자의 감소, 교양과목의 축소, 연구비 분배에서의 박대, 취업 전망의 어둠이라는 구체적 세목을 통해 체감되고 있다. IMF사태 이후 이러한 위기감은 꾸준히 확산되어 왔다. 이러한 위기감이 인문학의 현주소에 대한 내부의 자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사회적 기대나 수요에 부응하지 못하는 인문학의 유연성 결여에 대한 자기 비판도 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은 유독 인문학 분야의 고유현상이 아니다. 자연과학의 기초 학문 분야에서도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비슷한 현상이 목도된다.
우리 사회에는 인문학의 위상 추락을 촉진하는 여러 요인이 있다. 우선 광범위한 반(反)지성주의 내지는 반(反)지식인주의가 팽배해 있다. 초고속 산업화 과정에서 빚어진 가시적 효율성과 실용성 숭상은 모든 인문적 가치에 대한 평가 절하를 야기했다. 이에 맞섰던 민주화 세력의 실천 논리 또한 운동 효율성 추구 과정에서 인문적 가치와 인간 탐구의 정신을 도외시했다. 한때 '먹물'이란 말이 널리 퍼진 것은 그 대표적 징후이다.
선정적 구호를 선호하는 정권이 앞세운, 가령 '신지식인'이란 그림도 요약하면 경영 마인드로 무장한 시장(市場) 지향의 반(反)인문적 인간상이다. 그 희화적 사례를 우리는 작년의 줄기세포 스캔들에서 실감나게 목도했다. 정보화사회가 되면서 체계적 지식보다는 즉시적 소비에 적합한 정보 숭상현상이 생겨났다. 새로운 정보, 활용 가능한 정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정보가 숭상되고 이에 따라 고전이나 난해한 사상에 대한 탐구는 기피되며 그것은 반(反)인문적 풍토로 이어진다.
좋든 궂든 그 동안 우리 사회에서 사나운 위력을 발휘한 것은 사회역사적 상상력과 거기에서 유래하는 변혁의 논리였다. 조선조의 사대부는 사서삼경을 위시한 유학(儒學) 경전, 중국 역사와 고전 시를 습득함으로써 사회적 자아를 완결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조 전통사회는 닫힌 인문학적 상상력이 지배했던 시기요, 그 영광도 오욕도 거기서 유래한다. 근자의 사회역사적 상상력은 사회 변혁 의지나 낙관적 미래 전망으로 과대 평가되어 왔다.
지금 사회역사적 상상력을 주도하고 현실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철 지난 급진적 혹은 속류 사회학적 상상력이다. 변혁의 논리를 앞세워 사회적 대목적의 공유 아닌 해체를 기도하고 있으며 배제와 증오의 논리로 대중 영합을 꾀하고 있다. 어제의 신동(神童)은 오늘의 지진아(遲進兒)일 수 있다. 60년대의 진취적 구상이 21세기에는 가장 낙후된 것이 될 수 있다. 점증하는 사회의 저질화와 비속화는 사태를 극도로 단순화하는 배제와 증오의 논리와 무관하지 않다. 인문학적 상상력의 복권이 시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문학의 위기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대학의 위기이며 사회의 위기이다. 그 극복은 지엽 말단의 기술적 처리로 이루어질 수 없다. 사회적 대목적의 공유를 위한 발상의 전환과 새로운 지적 풍토의 조성이 절실하다.
(유종호 ·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