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관을 떠나 부산으로 향한 관부연락선 덕수환(德壽丸)이 4일 오전 4시경에 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으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는데…남자는 김우진(金祐鎭)이요, 여자는 윤심덕(尹心德)이었으며…연락선에서 조선사람이 정사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더라(부산 전보).'

1926년 8월 5일 일간지 기사이다. 이날부터 두 남녀의 현해탄 정사(情死)사건이 10여일간 잇따라 대서특필되었다.

당시 신문을 따라가 보자.

'윤심덕양은 동경음악학교를 수업한 후 조선의 악계를 풍비하다가 극단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토월회의 여배우로 있었다.'

'김우진씨는 목포에서 백만장자의 맏아들로 연전 동경 조도전대학 문학과 본과를 마치고 극(劇)에 관한 연구와 조예가 깊은 청년으로…'

신문은 사건의 원인을 나름대로 따지고 있었다. '윤양에 대하여 김우진은 실로 세상에 다시 없는 친구였고 애인이었다'. '나는 각본을 쓸 터이니 너는 배우로 나아가라'고 권고한 것도 김우진이었다. 그러나 김우진은 '이미 아내가 있고 자녀까지 있는' 상황이어서 윤양은 '남몰래 눈물과 긴 한숨을 지은 적이 한 두 번 아니었다'.

동갑내기인 그들은 자살하기 전 오사카에 함께 있었다. 윤심덕은 그 때 노래'죽음(死)의 찬미'를 '마음껏 불러 끝없는 슬픔을 느끼게 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1897년생 김우진은 목포 감리 김성규(金星圭,1863~1935)의 아들로 식민도시 목포에서 성장한 근대지식인이었다. 처음으로 근대극을 연구하고 도입한 인물이었다. 비평과 희곡, 시, 소설을 넘나들던 문인이요 예술가였다. '조선말 없는 조선문단에 일언'(1922),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1926)는 글들을 통해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는 봉건사회와 근대의 가치가 충돌하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인습과 전통이 그를 얽어매는 가운데 자유를 갈구했다. 더군다나 피식민지 상황.

그 스스로 '옛 것은 이같이 무너진다. 자신의 내부에 감춘 다이너마이트는 건설해 놓은 모든 것을 서서히 강력하게, 또한 분명하게 무너뜨린다!(시 '옛 것의 붕괴')'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찾고자 했던 해법은 현실에선 없었던 것일까. 그래서 결국 무너진 것이 그 자신이었을까.

그의 집안은 목포를 대표하는 유지(有志)가문. 동생 김철진은 1930년대 목포에서 종합시사문예지 '호남평론'을 발간했다. 아들 김방한(1925~2002)은 아버지의 서재에 가득했던 영어원서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언어학자로 대성했다. 김방한은 서울대 언어학과교수를 마치면서 1995년 그의 책과 자료를 모두 전남대 도서관에 기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