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여당은 14일의 한·미 정상회담을 '성공'으로 받아들인다. 이 회담은 원래 성공하게 돼 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어려운 문제(대북 제재)는 출제하지 않기로 사전에 약속하고 치른 시험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주 기본적인 문제(전시 작전통제권 단독행사)도 방향만 맞게 답을 쓰면 점수를 후하게 주기로 했다. 또 시험장 분위기가 좋으면 점수를 더 주기로 했다. 게다가 시험내용은 공개하지 않을 것이기에 얼마든지 '성공'으로 포장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회담 자체가 아니라 그 후이다. 왜냐하면 출제되지 않은 정말 어려운 문제는 각자 집에 가서 숙제로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당장 숙제를 할 이유도, 여유도 없다. 워싱턴은 정상회담이 끝난 후 언제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있었냐는 듯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이라크 문제와 테러전에 골몰하고 있다.
백악관도 이번 회담을 '성공'으로 평가할 이유가 있다. 겉으로는 한국이 듣고 싶어한 이야기를 다 해준 것 같지만, 대북 제재는 미국의 계획대로 한다는 것도 슬쩍 알렸다. 더불어 '동맹 이슈'를 한국의 국내 정치문제로 떠넘기는 데도 성공했다.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고로 한국에서 반미감정이 심화된 후, 미국은 반미감정의 불씨에 기름을 붓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고 있다. 한·미관계를 조율해 가는 과정에서 반미감정이 얼마나 큰 부담인지 배웠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에서 동맹 갈등으로 비화할 조짐이 있는 문제가 생기면, '한술 더 뜨기' 전략으로 대응하고 있다. 한국이 작통권을 달라고 하면 하루라도 더 빨리 가져가라는 식이다. 그러면 한·미는 싸울 일이 없고 갈등은 한국 안에서 폭발한다.
예상대로 정상회담의 후폭풍은 워싱턴을 떠나 태평양을 건넜다. 동맹관계에 대한 평가와 작통권을 둘러싸고 여야가, 진보와 보수가 싸우기 시작했다. 여야의 대응은 '정상회담이 외양상 잘 됐으니 한·미동맹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정부의 비약만큼이나 단순논리다.
국제정치의 세계란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경쟁의 장이다. 작통권은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선뜻 가져가라는 것이지, 자선사업을 하기 위해 내주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 작통권 이양을 재고하라는 외침이 들려올 때마다 부시 행정부 안에서 "우리는 미국 국익을 따를 뿐 한국 여론에 따라 결정하지 않는다"는 냉소가 들려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당은 정상회담 한 번을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열린우리당의 김근태 의장은 이번 회담에서 "동맹에 어떤 변화도 없다고 다짐했다"고 했고, 문희상 상임고문은 "(동맹에 대한) 일말의 우려와 불안을 한꺼번에 날렸다"고 했다. '자주'를 외치면서 어쩌자고 그렇게 의존적인지, 부시가 안보를 걱정 말라고 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한나라당도 감각이 없기는 매한가지인데, '서명운동', '방미단 구성', '장외투쟁' 등으로 대응할 태세다. 워싱턴의 정부와 연구소 관계자들은 "정부 차원에서 결론이 났는데 야당이 재고하라고 해서 될까요"라고 말끝을 흐렸다.
이제 정부는 우리 안보상황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국민들에게 내놓아야 한다. '설마 전쟁이 나기야 하겠어?' 하는 기분으로 대충 살자는 것인지, 안보공백을 메우기 위해 나이든 사람들은 세금을 더 내고 젊은이들은 군복무를 더 해야 하는 것인지 국민들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워싱턴에서 한국을 바라보고 있자니, 우리는 외세가 아니라 내세가 더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강인선 정치부 차장대우 insu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