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불임을 겪으면서 받은 마음의 상처가 온전히 치유되려면 또 17년이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피부과 의사를 남편으로 둔 치과의사 김미연(43)씨. 결혼 18년 만에 나이 마흔이 넘어 건강한 딸을 낳았다. 김씨는 "'불임의 정복'은 아기를 얻는다고 이뤄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에 대한 집착과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는 것이다. "참 이상하죠. 이젠 정말 포기할 수 있다고 마음을 다잡고 나니 오히려 아기가 생겼어요."
2003년 친구 성화에 못 이겨 미국을 5개월 동안 여행한 것이 김씨의 인생을 바꿔놨다. "친구가 미국 의사한테 진찰도 받아보고 좀 쉬어가라 했지요. 하지만 나이가 이미 마흔이니 큰 기대는 없었어요."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호텔방에서 친구가 건네준 책을 읽던 김씨는 전율했다. '사랑하는 친구의 임신 소식을 들으면 축하는 하면서도 좌절감이 들고 어느새 좌절감은 질투심과 미움으로 바뀌고, 또 그런 자신을 자책하고….'

김씨는 자신의 일기장을 누군가 훔쳐본 듯한 기분이었다. 하버드대학 산부인과 교수가 쓴 그 책은 그런 김씨의 심리가 불임을 겪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다독거려 줬고 불임 때문에 벌어지는 각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방법들을 알려줬다.

가까운 사람이 임신했을 때는 어떻게 대처하고 직장에서 눈치 주는 상사는 어떻게 피하며 남편과는 또 어떻게 하면 적으로 남지 않고 동지가 될 수 있는지, 아무리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는 신(神)과는 어떻게 화해하는지까지도 모두 들어 있었다.

숱한 '아기 갖는 법'에 질려 있던 김씨는 구원받는 느낌이었다. 김씨는 미국을 여행하면서 책 번역에 매달렸다. 그러면서 마음도 정리가 됐다. '이제는 아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리라.'

그런데 귀국 후 김씨는 아기를 얻었다. 마음이 편해서인지 자연임신이 됐다. 2004년 11월 번역한 책보다 딸 어진이가 먼저 세상에 나왔다.

17년 동안 김씨 부부도 안 해본 것이 없었다. 10여년간 불임 시술에 매달렸고 의사 체면 다 접어두고 전국에 용하다는 한의사는 모조리 찾아 다녀봤다. 심리 상담도 받았고 심지어 점집도 찾아갔다. "부부 싸움요? 마음속에선 이혼 도장 여러 번 찍었죠."

김씨는 "어진이를 갖고 나서는 책에서 일러준 대로 아무에게도 임신을 알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축하 꽃다발을 선물받으면 꽃이 시들기도 전에 유산하곤 했던 기억 때문이기도 했다. 몸이 다 망가지는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시험관 아기 시술을 받았고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되지 않아 '셀 수도 없이' 유산을 했던 것이다.

지난 6월에 김씨의 번역서 '아름다운 기다림'이 출간됐다. 남편은 김씨의 책을 읽고서 "눈물이 나더라"고 말했다. 친구들도 "네가 그렇게 힘든 줄 몰랐다"고 했다.

"태연한 척, 너무 열심히만 살았어요. 정작 필요한 것은 실컷 울고 충분한 '애도 기간'을 갖는 것이었는데…." 김씨는 불임으로 자신을 억눌렀던 감정들을 다 풀어 놓고서야 남들과는 조금 다른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했다.

김씨는 요즘 병원에서 "원장님 얼굴 자주 보네요"라는 소리를 듣는다. 눈 바로 밑까지 얼굴을 다 가려주는 커다란 마스크를 자주 벗기 때문이다. 예전엔 어린아이 환자만 보면 자기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솟던 김씨가 좀처럼 벗을 수 없는 '눈물 방패'였지만 지금은 그냥 마스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