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밖에 할 것 없이 삶이 난맥을 만나면 기도는 하지 않고 걱정을 하게 됩니다. 걱정을 하지 말고 기도를 하라지만 슬픔으로 마음이 상하고 피로와 짜증으로 몸이 상해 기도 길을 찾지 못하는 거지요. 그럴 때 여행을 떠난다면 네팔이 좋겠습니다.

소설가 전경린의 '그리고 삶은 나의 것이 되었다'(이가서)는 마음이 본능적으로 기도 길을 찾게 되는 땅, 네팔 여행 에세이입니다. 그녀에게 생존 이외에는 그 어느 것도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이는 가난한 네팔은 "오직 생을 용서하고 망각하고 그리고 인간적인 것에 대해, 그리고 신적인 것에 대해 기도할 수 있을 뿐"인 땅이었습니다. 그만큼 히말라야가 보살피는 네팔 사람들은 기도가 중심이었던 거지요.

"사람들은 모두 무엇을 비는 것일까. 그렇게 간절한 자세여도 알고 보면 시시하거나 황당한 기원들이지도 모른다. 그러나 빈다는 것은, 무엇을 빌어서 이룬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태도이며 이미 완결된 행위가 아닐까. 기원하는 사람은 침묵 속에서 매일의 사소하지만 또 너무나 간절한 것들을 이미 보살피고 있는 것이다."

간곡하게 빌다 보면 걱정도, 고통도, 절망도 저만치 사라지고 내 영혼이 보살피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걱정은 문제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이지만 기도는 응시입니다. 네팔에서 우연히 만난 한 선승(禪僧)은 차라리 관음(觀音)의 현현(顯現)이네요.

"모든 허구는 바라봄 속에서 재가 되는 것일세. 삶에서 일어나는 열렬한 감정들을 느끼고 바라보고 그대로 즐기시게. 자신이 지은 업(業)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감정들, 생각들, 느낌과 인식들, 괴로워하고 갈등하고 두려워하는 '나'를 죄책감도 나무람도 없이 바라보시게. 응시하는 사이에 더러는 저절로 소멸되고 더러는 스스로 반전될 거야."

사실 꼭 네팔일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뭔가를 툭툭, 털어 버리지 못해 삶이 무거워 허우적거릴 때 자기를 살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이를 악, 문다고 달라지거나, 툭툭, 털어내겠다 다짐한다고 버려지는 것은 없으니까요. 그 때는 차라리 내 안의 욕심을 응시하는 기도가 구원입니다. 내 욕심을, 내 집착을, 내 번뇌를, 그리고 어찌하기 힘든 내 이기적 자기 사랑을! 그러면 맹목적이기만 했던 욕망의 문맥이 보입니다. 그 자각(自覺)에서 최선의 생에 대한 의지를 키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전경린에 따르면 최선의 생은 스스로가 감동할 수 있는 생입니다.

"사랑하고, 사랑 받을 수 있는 깊고 풍요로운 정서적 힘과, 삶을 안정시킬 수 있는 융통성 있는 사색의 힘과… 나는 너희가 스스로에게 미소 지을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어머니로서 아이들에 대한 기원입니다. 욕심이 많은 거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이를 향해 기원할 수 있는, 이 이상의 기원이 또 있을까요?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