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보통 웨딩 촬영과 달랐다. 턱시도와 드레스가 보이지 않았다. 오는 10월 결혼을 앞둔 예비신랑 조현구(26)씨는 대신 축구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신랑의 품에 안긴 신부도 역시 흰 바탕에 빨간 줄무늬가 새겨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팀 유니폼 차림. 조씨는 "둘 다 축구를 좋아해서 데이트할 때도 유니폼을 같이 많이 입고 다녔다"며 "좀 색다르고 의미 있는 웨딩사진을 찍고 싶었다"고 말했다.
#장면 2.
김종진(35)씨가 딸 세빈(5)양과 거리로 나서면 사람들은 두 부녀를 주목한다. 아빠는 네덜란드 출신의 골게터 베르캄프가 입는 등번호 10번의 영국 아스날 축구팀 유니폼 차림이다. 딸 역시 자줏빛 바탕의 아스날팀 유니폼이지만, 등번호만 없는 유아용을 입었다. 축구용품점을 운영하는 김씨는 유명 프로축구 선수가 입는 복제 유니폼 12벌을 갖고 있다. 해외 사이트를 뒤져 딸에게도 한 벌당 7만~8만원씩 하는 유아용 복제 유니폼 4벌을 사줬다.
'레플리카(Replica)' 마니아들이 늘고 있다. '레플리카'의 사전적 의미는 복제품(複製品). 축구 팬들 사이에서 '레플리카'는 선수들이 경기에서 입는 유니폼을 판매용으로 만든 것을 의미한다. 실제 유니폼보다는 가격이 싸기 때문에 대부분의 팬들은 레플리카를 선호한다. 그래도 레플리카에 등 번호, 선수 이름 등 이것 저것 달고 나면 한 벌에 10만원이 넘는다. 마니아들은 청바지 등 일반 캐주얼 하의에 레플리카 상의만 입는 게 보통이다.
우리나라 팬들이 레플리카에 눈을 뜬 것은 2002년 월드컵 때 한국 국가대표 유니폼을 구입하면서부터. 이후 박지성, 이영표의 영국 프리미어리그 진출과 2006월드컵 등을 계기로 레플리카를 찾는 마니아들이 급속히 늘어났다.
레플리카 마니아들은 온라인에서 서로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레플리카 마니아들이 주로 활동하는 포털사이트 '다음'의 '레플리카 마니아스(cafe.daum.net/replicamanias)'의 회원 수는 2만7000명을 넘었다. '레플즈닷컴(www.replz.com)'이란 동호회 사이트도 4000명에 육박하는 회원을 갖고 있다.
레플리카 마니아들은 단순히 수집하는 사람들과 과감히 패션 아이템으로 활용하는 사람들로 나뉜다. 싸이월드에서 캐릭터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최상현(27)씨. 그는 샛노란 브라질 유니폼, 더없이 밝은 오렌지색 네덜란드 유니폼, 하늘 색깔을 닮은 아르헨티나 유니폼 등 화려한 레플리카를 입고 출근한다. "처음엔 다들 놀라고 신기해 했죠. 그러나 개의치 않고 매일 입고 나갔습니다." 시간과 함께 주위의 반응도 변했다. 회사 동료들은 이제 최씨가 어떤 유니폼을 입고 출근할지 내기를 하기도 한다.
반면 대학생 차부호(26)씨는 레플리카 수집 자체에 관심이 많은 정통 마니아다. 스페인의 페르난도 토레스를 좋아하는 그는 토레스의 유니폼만 40벌 정도 갖고 있다. 그는 "토레스가 입었던 모든 종류의 유니폼을 모으고 있다"며 "레플리카를 통해 느끼는 대리만족이 수집의 가장 큰 이유"라고 말한다.
물론 튀는 레플리카 마니아들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여성 마니아인 이초록(21)씨는 "레플리카를 입을 때마다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게 그런 것을 입는다'고 어머니가 핀잔하신다"고 말했다. 직장인 원동철(29)씨는 "여자친구가 레플리카를 입은 내 모습을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며 "설득시켜 언젠가 레플리카를 함께 입고 다니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만약 길을 걷다가 다른 레플리카 마니아를 만난다면? 60벌을 가지고 있는 마니아 권영석(25)씨는 "일단은 반갑지만, 서로를 훑어보며 상대의 레플리카를 평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곤 반드시 다시 뒤를 돌아다본다고 한다. 상대방 레플리카에 새겨진 선수 이름과 등 번호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경쟁의 원리는 레플리카 마니아 세계에도 작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