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낭기 인천취재본부장

'밤늦게 귀가하는 자녀가 무서워하지 않게 동네 골목길에 보안등이 하나 있었으면….' '집 근처 빈터에 쓰레기를 마구 버리는데 감시카메라를 설치했으면….' 살다 보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저 구청이나 시청에서 알아서 해주기만을 바랄 뿐, 적극 나서지는 못한다. 이런 얘기를 어디에다 해야 할지부터가 마땅치 않다. 혹시 잘 아는 지방의원이라도 있다면 하소연하는 게 고작이다.

그러나 광주시 북구, 울산시 동구, 대전시 대덕구에서는 다르다. 주민 대표가 구청의 예산 편성 과정에 직접 참여해 '우리 동네에 이러이러한 시설을 해달라'고 요구한다. 구청은 이를 검토해 예산에 반영한다. 주민참여 예산제도다.

울산시 동구의 경우 올해 예산에 41건의 주민 요구를 받아 15건을 예산에 반영하고 10건은 장기 과제로 돌렸다. 16건은 반려했다. 반영된 항목들은 모두 일상생활과 관련된 것들이다. 7000만원을 들여 쓰레기 무단 투기지역 10곳에 이동식 감시카메라 설치, 1억원을 들여 5곳의 비탈길에 미끄럼 방지 시설 설치, 1000만원을 들여 아파트 진입로의 하수관 교체….

광주시 북구는 49건을 접수해 12건을 반영했다.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실버 인터넷 교육 확대에 700만원, 주민자치센터 에어컨 구입과 러닝머신 교체에 2000만원, 동네 도서관 책 구입에 1000만원, 골목길 보안등 2개 설치에 1020만원 등이다.

이들 자치단체는 일반 주민 대상의 공개 모집과 시민·사회단체의 추천을 통해 예산 편성에 참여할 시민위원을 선발했다. 구별로 100명 안팎에 임기는 1~2년이다. 시민위원들은 각 구청이 마련한 '예산대학'에서 전문가들로부터 주민참여예산제의 필요성과 예산 편성 과정 등을 배운다. 예산 편성을 앞둔 7~8월경 시민위원들은 동(洞)별로 주민 의견을 수렴한다. 이어 전체 시민위원들이 모여 구청에 요구할 예산 명세서를 정리한다. 이 명세서는 구청 예산담당부서의 조정을 거쳐 다시 시민위원회 총회에 넘겨진다. 여기서 의결되면 예산안이 구의회로 넘겨져 최종 심의를 받게 된다.

이 제도는 광주시 북구가 2003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실시했다. 주민들이 낸 세금을 주민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 쓰도록 하려면 공무원 중심 예산 편성에서 주민 참여로 바뀌어야 한다는 게 그 취지다. 지방의회가 있지만 의회는 자치단체 전반에 걸친 큰 문제를 다룰 뿐 이런 자질구레한 문제까지 다루지는 못한다. 동네 사정을 그곳에 사는 주민들만큼 속속들이 알기도 어렵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제도를 실시하는 곳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전국 16개 광역자치단체와 230개 기초자치단체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다. 자치단체장들이 필요성을 못 느끼거나 번거롭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단체장의 의지가 문제인 것이다.

시·도지사나 시장·군수·구청장들은 선거 때면 주민을 지역의 주인으로 받들겠다며 한껏 몸을 낮춘다. 이번 5·31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그뿐이다. 선거를 치른 지 두 달밖에 안 된 지금 자신의 약속을 기억이나 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의문이다. 정말로 주민을 지역의 주인으로 모시겠다면 우선 주민참여 예산제부터 도입할 것을 권한다. 마침 지방재정법이 개정돼 올 1월부터 이 제도를 실시할 수 있는 근거 규정도 마련됐다.


(김낭기 인천취재본부장 ngk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