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에서 태어나 정명여학교를 나왔던 소설가 박화성(朴花城)의 두 번째 작품이자 문단추천작이 '秋夕前夜(추석전야)'다. 그 때가 1925년. 일제(日帝)의 압제가 본격화될 때이다. 그 작품에 그려진 목포의 풍경은 이러했다.
'남편 쪽에는 늘비한 일인의 기와집이요… 동북으로는… 땅에 붙은 초가집이요… 건너편 유달산 밑을 보자. 집은 돌 틈에 구멍만 빤히 뚫러진 도야지막 같은 초막들이 산을 덮어 완전한 빈민굴이다.…'
여전히 10년을 지나도 차별적인 상황은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목포인들이 발행했던 '湖南評論'(호남평론, 1935년 4월호)의 '넌센스'라는 코너를 보자.
'A가 물었다. "先生(선생)님 木浦(목포)안에 있는 洞里中(동리중)에 왜 湖南町(호남정)만은 그렇게 醜(추)하고 쓸쓸하니 木浦府(목포부)는 湖南町만을 잊었을까요?" 선생이 답했다. "그런게 아니라 湖南町은 즉 ?濫町이니까."…'
?는 효, 고, 각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호남정이라는 동음이의어를 염두하고 썼던 것으로 보인다. '땅이 단단하고(?)' '물이 넘치는(濫)' 뜻의 한자를 써서 '살기 어렵다'는 뜻을 자조하고 있다. 이 호남정은 목포에서 빈민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산 곳이었다.
일제는 거주지를 구별하였다. 일인 등 각국 공동거류지와 조선인의 거주지로 나누었다. 거류지에는 일인들과 식민기관인 여러 관공서가 집중했고, 하수구 등 도시기반시설을 제대로 갖추었다.
반면 조선인 거주지는 '길은 좁고 조금만 비가 와도 다닐 수가 없고' '날마다 송장 타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전등도 없는' 그런 사람 살 곳이 되지 못했다. 고석규 목포대교수는 이를 두고 '식민지 도시 공간의 이중성'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최근 목포에 갔다. 일제의 대표적인 수탈기구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현 중앙동)을 보기 위해서였다. 목포지점은 1920년 세워졌다. 1900년에 세워진 일본영사관에서 바로 내려다 보이는 자리였다. 이곳에서 일제침략사와 목포의 근대사를 담은 '특별사진전'을 열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진 속에서 '식민도시' 목포의 모습이 되새겨지고 있었다.
'일인들만의 거리'였던 중앙동 일원에는 지금도 일제시기에 세워진 건축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수탈과 차별지배의 본산인 일본영사관이 지금은 일제의 침탈을 소설로 고발한 박화성의 문학관과 목포문화원으로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