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전북 부안군 위도(蝟島)에는 찬바람이 불었다. 2003년 이맘때 방사성폐기물처리장(방폐장) 후보로 선정돼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섬 위도는 상처투성이였다. 지난 6일 돌아본 섬 구석구석엔 조업을 포기한 폐선(廢船)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한때 500여 척에 이르던 위도 배들 가운데 조업에 나서는 배는 하루 50여 척에 불과하다. 상처만 남은 부안. 3년 세월이 지난 지금, 그 상처는 어떻게 하면 치유될 수 있을까. "뭐여! 방폐장 말이요. 내가 그놈의 것만 생각허먼 혈압이 팍팍 오르능겨. 이 망할 놈의 섬을 무인도로 만들어서 정부에 줘 버려야 혀." 식당에서 만난 위도 주민에게 방폐장 얘기를 꺼냈더니 갑자기 역정을 냈다.
김종규 전 부안 군수가 방폐장 유치를 신청한 날은 2003년 7월 11일. 부안군민들은 이날을 잊지 못한다. 이후 7개월 동안 벌어진 집회 총 295회. 하루에 두 번꼴로 시위가 벌어졌다. 전쟁터가 됐다. 등교거부투쟁(42일간), 고속도로점거시위(3회), 해상시위(2회) 등 다수 군민이 방폐장 반대시위에 참여했다. 전국에서 모여든 환경단체 활동가들은 '반핵(反核) 부안'을 외치며 쇠파이프와 화염병, 염산 담은 병, 썩은 젓갈봉지, LPG 가스통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정부는 결국 2004년 9월 '부안 방폐장 백지화'를 선언했다.
방폐장 사태가 부안에 남긴 상처는 깊고도 컸다. 2년여 동안 매일같이 시위가 벌어졌던 군청 앞 부안초등학교에서는 2003년 한 해 544명의 학생이 전학을 갔다. 학교 관계자는 "보통 한 해 100명 정도 전학 가는데 등교거부 투쟁과 시위 때문에 학교를 떠난 학생들이 300여 명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부안 군민들을 '찬핵파'와 '반핵파', 둘로 갈라놓은 것은 지울 수 없는 상처다. 당시 부안 육지 사람들은 방폐장 반대 여론이 90%에 가까웠다. 세월이 지난 지금, 반핵과 찬핵 여론은 엇비슷하다.
"나는 지금도 찬성파 만나면 등 돌리고 앉어. 자기 혼자 잘 살 것다고 고향 팔아 먹으려고 한 사람들과는 말도 섞으면 안 되는겨."(부안읍 시장 상인 김모씨·여·73)
"그때는 방폐장에 찬성하는 사람이라도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다. 상인들도 데모하러 안 나가면 찬핵파로 낙인 찍혀서 시위대들이 가게 유리창이고 뭐고 박살내 버렸다."(부안군청 앞 가게주인 김모씨·52)
반성과 회한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상인 김모(56)씨는 "아무것도 모르는 촌 사람들이 시민단체 나부랑이들한테 속아서 난리를 친 것이제…"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부안서 죽기살기로 반대하던 방폐장이 (2005년 11월) 경주로 떡 허니 가는 것을 보니까 우리가 뭘 위해 싸웠나 싶더라"고 했다.
방폐장 유치 실패의 가장 큰 피해자는 위도 주민들이다. 이들이 방폐장 유치에 나선 것은 칠산어장 어획고 감소로 생계가 위험해진 것이 계기였다. 항구에서 그물을 손질하던 김모(여·55)씨가 말했다. "얼마나 살기가 폭폭허면 고향 땅에 방폐장을 넣것다고 혔것어요. 3년 전엔 장관이며 한수원(한국수력원자력) 사람들이 찾아 와서 방폐장 넣고 집집이 몇 억씩 줄 것처럼 말을 흘리고 다녔지라. 근디 이젠 지난 일이라고 입 싹 닦아 버리고 끝이여. 완전히 위도 사람들만 XX 돼 버린 것 아녀요."
생존의 위기에 처한 위도 주민에겐 정부의 관심이 절실하다. 주민 정영복(53)씨는 "위도 앞바다는 영광원전 온폐수가 해류를 타고 흘러 와 피해를 입고 있다. 또 새만금 방조제가 막혀 어장 피해가 발생했지만 보상에서 제외됐다. 정부 대책이 필요하다."
부안을 떠나기 전 격포면 주민 최유순(56)씨는 서울사람들에게 이 말을 꼭 전해달라고 했다. "3년 전 부안 일은 어차피 지난 것이고 이젠 치고박고 싸울 일도 없지라. 부안은 깨끗한 곳잉께 많이덜 놀러 오시고, 부안 젓갈이나 쌀도 많이만 먹어 주면 고마울 따름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