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시작해서 천천히, 그리고 즐겁게 가자!"
일명 '느림보' '달팽이' 영어교육이 엄마들 사이에 조용히 확산되고 있다. 우리나라에 조기 영어교육이 시작된 지 10여 년. 하지만 영어교육에 앞장섰던 엄마들에게 '영어는 기술일 뿐, 궁극적 목적은 아니다'라는 인식이 정착되면서 영어에 성급히 '올 인' 하던 태도에서 영어를 다양한 놀이로 즐기는 쪽으로 방향을 바꿔가는 중이다.
그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 '영어 거부증'이다. 학습 위주의 교수법, 또래 아이들과의 비교, 잦은 레벨 테스트 등 부모의 조급한 기대와 강박증이 아이들을 영어에 쉽게 지치게 하는 결과를 낳은 셈. 영어 거부증을 극복한 베테랑 엄마들은 우선 '잉글리쉬 디바이드(영어 격차)'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라고 충고한다. 아이가 워크북 위주의 수업이나 딱딱한 학습지 형태를 싫어한다면, 동화책·만화·비디오 등 다양한 놀이 형태로 스타일을 과감히 전환하라는 것. '달팽이 영어'를 만끽하고 있는 다은(7)이와 영상(12)이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놀이로 시작해 영어랑 친구된 다은이
6개월부터 영어 동요 들려줘 '정확히' 보다 '신나게' 중요시
인터넷에서 '피기맘'으로 유명한 백미진(35)씨는 '일찍 시작해 천천히 가고 있는' 달팽이 영어교육의 전형. 학습지는 물론 영어유치원 문 앞에도 가본 적 없는 1학년 다은(7)이는 마치 외국에서 살다 온 듯 능숙하게 영어를 구사한다.
얼마 전 싱가포르 여행에서는 아이의 영어 실력에 엄마도 깜짝 놀랐다. "중이염 증세가 보여 근처의 병원에 갔었죠. 증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요. 그런데 다은이가 의사선생님에게 영어로 한쪽 귀에 벌레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거에요. 가래가 짙어지니 우유나 치즈를 먹지 마라, 당분간 수영은 안된다는 의사의 조언도 다은이가 알아듣고 저에게 설명해줬지요."
비결은 뭘까? 우선 일찍 시작했다. 아이가 6개월부터 'We sing' 시리즈 같은 영어 동요를 들려줬고, 말귀가 트일 무렵엔 영어 그림책을 엄마가 먼저 읽어준 뒤 원어민 발음의 테이프를 반복해서 들려줬다. '듣기'가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백씨가 가장 효과가 높았다고 생각하는 건 '영어놀이'다. "폐품놀이, 밀가루 반죽 놀이처럼 아이가 좋아하는 놀이를 하면서 영어를 했어요. 'Water is cool' 'What do you want to make' 하는 식으로 아이가 알아듣든 못알아듣든 저 혼자 묻고 대답했죠. 대신 단어 낱개가 아니라 1형식이라도 완전한 문장으로 표현했어요. 'apple(사과) 먹을래?'가 아니라 'Do you want to eat some apples?'처럼요. 해석도 안했어요. 눈앞의 사과를 보면서 제 말을 이해할테니까요." 아이의 실력을 일부러 평가하지 않은 것,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활용한 것도 주효했다. "쇼핑할 때, 영어서점 갈 때 등 기회 있을 때마다 영어를 활용했어요. 한국말처럼 영어도 똑같이 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는 언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지요."
백씨는 엄마가 똑똑해서도, 다은이가 뛰어나서도 아니라고 말한다. "영어에 대한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즐겨온 덕분이죠. 저야말로 중학교 1학년 영어 수준인걸요.(웃음) 동화책 한 권을 읽더라도 아이가 진짜 신이 나서 읽어야 효과가 있어요. 의무감으로 하는 건 오래 못가죠."
영어 거부증, 동화책으로 극복한 영상이
과감히 학원 끊고 책장엔 그림책을 실력 시험하지 말고 '흥' 돋워줘야
아이가 지금 영어 거부증을 앓고 있다면 6학년 영상(12)이의 극복기를 참고하자. 초등 2학년때 심각한 영어 거부증을 앓은 영상이는 '느릿느릿 영어책 읽기'로 영어에 다시 재미를 붙인 케이스다. "영어유치원만 해도 그럭저럭 적응했는데 초등학교 올라가더니 짜증이 부쩍 심해지고 거짓말까지 하는 거에요. 학원 진도는 빠르고, 숙제도 많으니 뛰놀 시간이 없어 아이가 시름시름 앓더라구요."
엄마 이금희(42)씨는 과감히 학원을 끊었다. 대신 쉽고 재미있는 영어그림책과 동화책을 책꽂이에 꽂아주고, 아이 스스로 꺼내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 "내 영어 실력은 빵점"이라며 웃는 이씨는 "아이를 위해 내가 한 일이라고는 리스닝 전용 동화책에 딸려 나오는 듣기 테이프를 정해진 시간에 하루 한번씩 틀어준 것뿐"이라고 말했다.
책장 한 쪽에 문장 한 줄인 그림책부터 시작했다. 시간도 하루 20분에서 1시간으로 점차 늘려갔다. 자기가 재미있어 하는 책은 일주일에서 한 달 정도 매일 들어 나중엔 책을 통째로 외웠다. 파닉스도 저절로 터득했다.
이씨 역시 아이의 실력을 시험해보지 않았다. 대신 책 한 권 다 읽으면 작은 파티를 열어 공부의 '흥'을 돋웠다. "단어와 문법을 많이 아는 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학원 다닐 때 한 달에 200개씩 단어를 외웠어도 금세 까먹었거든요. 문법도 아이 스스로 필요하다고 느낄 때 시작하는 게 가장 좋아요." 실제로 문법이 궁금해진 영상이는 요즘 'EBS 능률영어'를 사서 즐겁게 '독학' 중이다. "아이의 능력, 취향을 가장 잘 아는 건 엄마예요. 그에 맞게 속도를 조절해주고 기다려줘야 하고요."
영어! 앞으로는 초등 1년때부터 배운다니 어떻게든 준비는 해야 하는데 어떻게 시작하지? 한글도 겨우 뗄까말까인데, 알파벳은 또 어떻게? '영어 거부증'의 첫 고비도 바로 알파벳 떼기에서 시작된다.
이런 고민으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엄마라면 '예진 맘' 박은영씨 비법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영어 입문, 그 중에서도 알파벳 쓰기를 어려워하는 아이들에게 '명약'이 될 만한 조언! '기차 ㄱㄴㄷ'으로 한글 첫걸음을 떼게 도와주었던 그림책 작가 박씨가 이번엔 '악어 ABC'(비룡소)를 펴냈다. 알파벳 쓰기를 유난히 싫어했던 예진(10)이와 그림놀이를 하며 터득한 경험. 그렇게 맛들인 영어가 지금은 쑥쑥 자라 예진이는 '영어 프리젠테이션'의 도사가 됐다.
방법은 단순하다. "알파벳을 여러 가지 동물, 사물의 모양으로 표현해보는 거예요. 숨은 그림 찾기는 가장 쉬운 방법이죠. 세모 지붕 속에 'A'자를 숨겨놓는 식으로요."
아이와 함께 상상하며 만들어낸 알파벳으로 이야기도 꾸며보자. 연상작용이 일어나 훨씬 쉽게 체득한다. 점선 따라 알파벳 쓰는 것에 질색인 아이라면 더더욱 효과적. "나중엔 아이가 먼저 알파벳 놀이를 하자고 조를 걸요? '악어ABC'에서 코끼리가 앞으로 나란히 하는 모습을 응용한 'E'는 예진이 아이디어였어요. 모양이 비슷해 'G'와 'Q'를 헷갈려 했는데, 다리 달린 기린(G)과 동물들이 얼기설기 모인 그림(Q)으로 구분해줬더니 금세 익혔지요."
쉬운 단어와 짧은 문장이 반복되는 영어 그림책을 많이 보여주고 읽어주는 것도 좋다. 덕분에 예진이는 알파벳은 물론 파닉스까지 혼자서 뗐다. 일단 알파벳에 익숙해지면 보다 다양한 영어놀이를 할 수 있다.
"'아나스타샤' '슈렉' 같은 영화를 자막없이 반복해서 틀어줬어요. 예진이가 요리를 좋아해 음식을 만들면서 관련된 단어들을 써먹기도 하고요. 요즘엔 일기장에 한글 일기와 영어 일기를 번갈아 쓰는 것에 재미를 붙였죠.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서 영어로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망설임, 두려움이 없어진다는 게 가장 큰 보람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