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후 경기도 안산의 원곡고등학교 운동장. '또 하나의 월드컵'이 열리고 있었다. 수만 명의 관중도, 수백 명의 취재진도, 그라운드를 덮은 푸른 잔디도 없지만 열기와 함성은 독일의 현장 못지 않았다.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가 주최한 '제5회 국경 없는 마을배 안산월드컵'. 각국에서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온 노동자들의 화합을 바라는 뜻에서 4년 전 한·일 월드컵 때 시작돼 해마다 이맘때 안산을 뜨겁게 달군다.

올해 참가팀은 독일월드컵 참가국인 가나와 코트디부아르를 비롯, 인도네시아·우즈베키스탄·우간다·태국·미얀마·중국(조선족)·중국(한족)·나이지리아·베트남·스리랑카의 12개. 경제가 신통찮아 개최 여건은 좋지 않았다. 그래도 고기집 사장님, 치킨집 사장님, 고시원 원장님 등 이웃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 대회 비용을 댔다.

말만 '월드컵'은 아니다. 3개국씩 4개 조로 나눠 리그를 치른 뒤, 8강부터는 토너먼트로 승자를 가리는 FIFA 방식이다. 차이가 있다면 예선부터 결승까지 모든 경기를 하루에 치르는, 좀 가공할 만한 스케줄. 경기 시간은 전·후반 총 30분으로 줄였고, 무승부면 곧바로 승부차기다.

12개국 응원단이 스탠드에 모두 모인 것도 독일에선 볼 수 없는 풍경. 나란히 붙어 앉은 가나와 코트디부아르 응원석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전날 '독일 경기'의 결과 탓. 체코를 이긴 감격에 가나인들은 "마와닌자 가나!(가나 화이팅)"를 외쳐댔다. 반면 네덜란드에 패해 예선 탈락한 코트디부아르 응원단은 여기서도 좀 썰렁해 보인다.

결승에 진출한 두 팀이 이례적으로 한데 모여 기념촬영을 했다. 태국이 빨간 옷, 나이지리아가 하얀 옷. 경기는 태국이 우세했지만, 승부차기에서 이긴 나이지리아가 우승했다. 정지섭기자

가나의 삼(38) 선수는 "축구는 가나의 모든 것이고, 가나는 아프리카의 희망"이라며 "미국도 꺾고 2002년 한국처럼 4강에 간다"고 큰소리 쳤다. 코트디부아르 술레만(30) 선수는 "패인은 감독의 작전 실수"라며 인상을 찡그렸다. 얄궂게도 아프리카의 두 라이벌은 8강전에서 만났다. 가나의 2대0 승.

쓰레기 치우기, 경비, 구급차, 음료수 등 경기장 밖 궂은 일들은 한국 이웃들의 몫. 안산경찰서 빙순호(48)경사는 "10년 전만 해도 외국인들을 무시하고 고압적으로 대한 사람이 많았는데, 정말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뙤약볕 아래서 거듭된 혈전 끝에 '동남아 맹주' 태국과 '수퍼 이글스' 나이지리아가 결승에서 만났다. 태국의 파상 공습을 막아낸 나이지리아의 우승. 승부차기에서 4대3으로 짜릿하게 이기면서 작년 페루에 패해 준우승에 그친 한을 풀었고, 독일에 가지 못한 아쉬움도 달랬다.

시상식이 끝난 뒤 모든 참가팀 선수와 응원단은 '국경 없이' 어우러져 동사무소에서 마련한 치킨과 음료수로 뒤풀이를 벌였다. 훌리건도, 판정 시비도, 승자의 거만이나 패자의 좌절도 없는, 흥겨운 잔치 월드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