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대통령 취임식 사흘 전, 케네디는 플로리다에서 워싱턴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타임’ 기자가 다가가자 케네디는 종이에 뭔가를 휘갈겨 쓰고 있었다. 취임사를 쓰는 중이라고 했다. 기자들은 착륙 전 케네디 손에 원고 9장이 들려 있는 걸 봤다. ‘케네디가 취임사 초고를 쓰다’. 이튿날 신문 제목은 44년 뒤 ‘케네디 취임사 만들기’라는 책에서 뒤집혔다. 측근 소렌슨이 초고를 이미 잡아놓았는데도 케네디가 연출을 했다는 것이다.
▶스피치라이터(speechwriter)의 역사는 길다. 해밀턴 재무장관이 워싱턴 대통령의 연설문을 만졌다는 사실은 워싱턴이 그에게 보낸 편지로 드러났다. 워싱턴은 “원고를 몽땅 뜯어고치는 게 낫다고 하겠지만 조금만 고쳐 달라”고 청했다. 워싱턴의 유명한 퇴임 연설 초고도 해밀턴이 작성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대필자 여럿을 뒀다. 세네카는 네로 황제 즉위 연설문을 써줬다. 시저의 명언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도 대필자가 도와준 것이라고 한다.
▶레이건은 자신을 ‘위대한 전달자(communicator)’로 만들어준 명 스피치라이터 페기 누넌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누넌은 레이건의 입에 옮겨진 자신의 언어로 시대를 흔들었다. 소련을 가리킨 ‘악의 제국’은 냉전의 승부를 가른 ‘촌철살인’이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는 루스벨트의 명언은 레이먼드 몰리가 빚어냈다.
▶스피치라이터들도 몸을 사리는 분야가 외교다. 외교 쪽 연설문만큼은 국가안보회의(NSC)가 만들어주는 게 관례다. ‘대통령의 연설’이라는 책을 낸 커스네트는 “외교는 단어 하나가 국제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유머도 웬만한 스피치라이터가 넘보기 힘든 분야다. 버지니아 시골에 사는 랜든 파빈은 부시가 유머 연설을 준비할 때마다 달려간다. 파빈은 레이건 때부터 백악관 유머를 도맡다시피 했다.
▶부시의 키워드 ‘악의 축’과 ‘온정적 보수주의’를 만들어낸 마이클 거슨이 건강이 나빠 6년 만에 백악관을 떠난다. 그는 “모든 스피치라이터의 꿈은 두고두고 사람들 입에 오르는 금언(金言)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시대 청와대에선 어떤 명구와 금언들이 만들어졌나. 대통령의 말이 어느 스피치라이터 작품이냐고 화제가 된 적이 있었던가. 대통령이 입만 열면 참모들이 해명하기 바쁜 걸 보면 스피치라이터가 있으나마나 아닌지 모르겠다.
(주용중 논설위원 midwa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