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영원히 머무는 곳'. 간판에 쓰여진 부제는 그냥 의례적인 광고카피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안에 들어가니 별천지다. 17평을 채우고 있는 수천 칸의 이중 진열장. 진열장 앞면과 사이 사이 옆구리를 채우고 있는 10만여 개의 비디오와 DVD. 사람 한 명 지날 정도로 좁은 통로 말고는 죄다 꽉꽉 들어찼다. 어지간한 영화는 다 찾을 수 있을 거란 감동이 와락 밀려든다.

문턱 바로 앞에서 만난 주인 손태영(47)씨. 스포츠 머리에 거뭇한 피부. 뽀빠이 청바지를 입은 이 아저씨, 왠지 뻣뻣해 보였다. 말을 걸자 역시나, 심드렁하다. "언제부터 하셨어요?" "15년 됐어요." "와, 이게 다 몇 개죠?" "10만개 쯤." 새로 나온 DVD에 스티커를 붙이며 그가 띄엄띄엄 들려준 사연인 즉 이렇다.

16년 전, 증권회사 다니던 손씨는 실적 압박 때문에 직접투자를 감행하다 부모님 집 두 채를 날리고 잘렸다. 8㎜ 영화 동호회에서 단편을 찍었을 만큼 영화광이었던 그가 생각한 건 비디오 대여점. '영화는 능력 있는 사람이 찍게 하고, 나는 좋은 영화를 많이 보여주는 사람이 되자.' 그래서 "손님이 보고 싶은 영화는 어떻게든 구해 빌려준다"는 원칙을 세웠다. 출시된 비디오는 무조건 구입, 희귀영화는 따로 '지방출장'을 다니며 구했다. 한달 중 20일은 전국 비디오가게를 순례, 주인을 술과 안주로 꾀어낸 다음 "외화 3개 줄 테니 '장한몽'(신상옥 감독) 좀 주쇼" 하는 식이었다. 출시되지 않은 영화는 주문제작하기도 했다. 잘 될 땐 한달 4500만원도 벌었다. 6년 전 영화 잡지에서 '우수 비디오 대여점' 1위로 뽑히는 영광도 안았다. 하지만 아무리 용 써봐도 대세는 대세. 하루 1만~2만원씩 매상이 줄더니 이제는 임대료 내고 새 DVD 사고 나면 용돈 정도 남을까. 아내는 "나라도 벌어야 한다"며 할인마트에 나가고, 부모님은 "그만 때려 치우라"고 성화다. 손씨는 "그래도 하는데 까지 해볼게요"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중이다.

'미래 영상'은 집념의 산실인 셈이다. 지금까지 버틸 수 있던 건 입소문 듣고 찾아오는 단골 덕분. 비싼 '가입비'(3만원, 동대문구 주민은 1만원) 마다 않고 찾아준 손님이 1만4000명이다. 그 중엔 '산딸기'의 김수형 감독(김수용 감독 연출부 출신)같은 유명인사도 여럿이다. 개업 초기부터 가입비를 받아 온 건 그가 수집한 희귀영화의 가치를 알아주는 손님만 받겠다는 의지였다. 대신 서비스는 확실하다. 전화만 걸면 '퀵'으로 보내주고, 보고 싶다고만 하면 에누리 없는 오페라 실황도 사다가 빌려준다. "내가 여기 앉아 노는 것 같죠? 얼마나 바쁜지 아무도 몰라. 스티커 붙이고, 장부 정리하고, 인기 순위 매기고…. 진열된 위치도 매일 조금씩 바꿔줘야 해요. 그래야 손님 손을 타거든."

손씨는 두 시간 동안 꿈을 꾸게 해주는 영화를 사랑한다고 했다. 하지만 현실은 악화일로. "세상에서 제일 좋은 비디오 가게를 만들면 다 잘 될 줄 알았죠. 애들도 대대로 걱정 없을 거라고 믿었어요. 근데 물려받겠다던 딸도 이젠 시큰둥해요. 누가 다 죽어가는 사업을 하고 싶겠어요. 그저 간판 제목처럼 '영화가 영원히 머무는 곳'으로 남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