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5월 24일 파리에서 프랑스 와인 판매상인 영국사람 스티븐 스퍼리어가 와인 품평회를 열었다. 프랑스인 8명을 포함한 1급 감정가 9명이 상표를 가린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 레드와인들을 마셔본 뒤 촌평을 했다. “이건 분명코 캘리포니아 와인이군. 향기가 없어.” 그건 보르도 명품 ‘바타르 몽트라셰’였다. “프랑스의 장엄함”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1위에 뽑힌 건 알고 보니 캘리포니아 와인이었다.

▶스퍼리어는 프랑스 와인 홍보행사쯤으로 품평회를 했다가 당황했다. 몇몇 심사위원은 불과 10년 전 산업생산을 시작한 풋내기 캘리포니아 와인을 자기가 선택했다는 데 울분을 터뜨렸다. ‘타임’ 기자가 이 ‘파리의 심판’을 세계에 전했다. 프랑스 와인업자들은 “사기극”이라고 분노했다. 스퍼리어는 1년 동안 프랑스 포도원 시음 여행을 금지당했다. 프랑스 ‘르 피가로’와 ‘르 몽드’는 서너 달 뒤에야 “웃기는 결과”라고 보도했다.

▶꼭 30년 만인 24일 스퍼리어가 재대결 자리를 만들었다. 런던과 캘리포니아 와인 명산지 나파밸리에서 진행한 품평에서 캘리포니아산은 1~5위를 휩쓸었다. 보르도의 자랑 ‘샤토 무통 로쉴드’는 6위였다. 한 프랑스 심사위원은 30년 만에 다시 참가해서도 캘리포니아산을 보르도산으로 헛짚었다. 그는 “귀국하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스퍼리어는 “보르도는 캘리포니아를 이길 수 없다”며 “완벽한 승리”를 선언했다.

▶세계시장에서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신세계 와인’들이 보르도가 상징하는 ‘구세계 와인’을 몰아붙이고 있다. ‘파리의 심판’은 미국·칠레·호주·남아공 같은 ‘와인 신세계’에 큰 자극과 용기를 줬다. 저마다 와인산업을 키우고 품질을 높이는 데 투자했다. 나파밸리 인근 UC 데이비스는 와인 양조학의 세계적 명문대가 됐다.

▶프랑스는 작년에 대체연료 에탄올을 뽑느라 1등급 ‘AOC’ 와인 1억3000만병을 끓였다. 가격 경쟁력 하락, 수출·내수 위축, 과잉 생산으로 와인값이 물보다 싸진 탓이다. 프랑스는 ‘파리의 심판’이 울린 경고음을 무시한 채 안으로 새로운 연구와 시도를 낡은 법으로 묶고, 밖으로 ‘주는 대로 사가라’식 콧대 높은 장사를 해왔다. 하다 못해 상표도 길고 복잡하다. 소비자들은 간명하게 품종쯤만 표기한 ‘신세계 와인’에 손이 더 간다. 요즘 ‘노통’이라는 프랑스 와인이 한국에서 잘 팔린다는데 이름 덕분일 것이다.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tjo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