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그 존재의 숨결이다.
왕이 그녀에게 내린 이름을 그는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불렀다. 춤을 출 때는 서 여령(女伶)으로 자수를 놓을 때는 서 나인으로 소아에게는 진진으로, 강연(姜淵)에게는 은방울로 불리었던 그녀는 이제 리진(李眞)이었다.
왕이 그녀에게 성과 이름을 하사한 밤에 왕비는 그녀를 중궁으로 불렀다.
왕비와 그녀 사이에 커피와 케이크가 놓였다.
왕비는 그녀에게 더 가까이 오라, 하였다. 왕비의 자당의에는 녹빛이 감도는 배꽃 매듭의 단작 노리개가 매달려 있었다. 노리개의 부드러운 술이 눈앞에서 찰랑거렸다. 그녀가 왕비와 그리 가까이 앉기는 네 살 이후로 처음이었다.
왕비는 그녀에게 왕이 왕가의 이씨 성을 하사한 건 그녀를 딸로 여기는 것과 같다 하였다. 그녀는 윤기 흐르는 머리에 옥 첩지를 단정히 꽂고 있는 왕비의 흰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어 깊이 머리를 숙였다.
―그러니 너를 떠나 보내는 내 마음 또한 여염집 같으면 여식을 시집 보내는 마음과 같다.
그녀는 더욱 깊이 머리를 숙였다.
―이름의 주인이 어떻게 사느냐에 그 이름의 느낌이 생기는 게야. 사람들이 네 이름을 부를 때면 은혜의 마음이 일어나도록 아름답게 살라.
영리하고 차갑고 야망과 슬픔을 동시에 지닌 매혹적인 왕비의 자상한 이름에 그녀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은 없느냐?
―….
―없는 게로구나!
―춘앵(春鶯)무를 추어드리고 싶사옵니다.
왕비의 갸름한 얼굴에 잠시 미소가 번졌다. 궁중에서 그녀의 춤을 가장 즐기는 사람은 왕비였을 것이다. 왕비는 궁중의 무희들 중 춘앵무를 으뜸으로 추는 이는 서 여령이라며 그녀를 치켜세우곤 했다.
왕비에게서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그녀는 공손히 물러나 앉았다. 일어서서 사뿐히 화문석 위로 올라갔다. 춘앵무는 봄날 내연(內宴)에 가장 많이 쓰이는 독무였다. 왕비 앞에서 추는 마지막 춤이라는 것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춘앵무 속에는 비리, 타탑고, 낙화유수, 화전태… 궁중무의 춤사위가 녹아들어 있었다. 음악도 없이 화관도 쓰지 않고 앵삼을 입지도 못한 채 추는 춤이었으나 그녀의 움직임은 어느 때보다 절제되어 있고 정성스러웠다.
―나는 개화된 세상에 나가보길 꿈꾸나 이 궁궐에서 한 발짝도 옮기지 못할 처지이니 네가 부럽구나.
왕비의 목소리가 땀에 젖어 가는 그녀의 귀에 흰 구름처럼 일렁거렸다.
―너는 사랑을 얻어 개화된 세상에 먼저 나가는 것이니라. 이별을 서러워 마라.
그녀는 춤사위로 나무가 되려 하고 불이 되려 했다.
―조선의 여인으로 먼 길을 떠나는 건 네가 처음일 게야.
땅이 되려 하고 쇠가 되려 했다.
―다른 세상에 가서 여태의 족쇄를 풀어버리고 많은 것을 새로 배우고 익혀 새 삶을 가지거라.
드디어는 물이 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