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개막 전야의 분위기는 언제나 불온하다. 세계인들의 마음이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원시의 건강성이 넘치는 축제모드로 전환되는 시간. 컴퓨터 메인 프로그램을 재부팅하는 심정으로, 축구팬들은 4년에 한 번씩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다. 2006년 5월, 이 짜릿한 긴장감이 상암벌을 가득 메웠다. 축구에서 처음 5분과 마지막 5분이 중요하다는 건 만고불변의 상식이다. 관중석도 예외는 아니다. 대 세네갈 전, 결의를 다진 관중은 경기 시작 20분 전에 이미 좌석을 가득 메웠다. 뒤늦게 입장해서 자리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는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종료 15분을 남겨두고 하나 둘씩 경기장을 빠져나가던 조기퇴장의 분위기도 사라졌다. 종료 3분 전에 동점골을 터뜨리고, 연장전에 기어이 골든골을 집어넣는 팀의 경기라면, 마지막 0.1초까지 눈을 부릅뜨고 공과 선수들의 움직임을 지켜볼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이미 월드컵 본선이었다. 단순한 평가전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응원단은 서울 월드컵 경기장 거의 전부를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붉은 셔츠를 입고 오지 않은 사람들은 삼삼오오 즉석에서 옷을 구입하고 서둘러 상의를 갈아입었다. 지난 3월 1일 대 앙골라 전 때만 해도 붉은빛은 관중석의 주류가 아니었다. 언제나 주인 없이 남아있던 맨 꼭대기 구석자리도 이날만큼은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빈틈을 보이지 않기는 운동장도 마찬가지였다. K리그 경기 때 여기저기서 듬성듬성 맨땅을 드러냈던 잔디는 지금 당장 월드컵 결승전을 치른대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완벽했다. 한 올 한 홉의 빈 구석이 없었다. 90분 내내 기립한 채 파도처럼 출렁이며 함성을 토해내던 붉은 악마의 위용까지, 경기장 안팎에는 관중 모두와 관리요원과 기자들과 자원봉사자들의 마음을 한데 묶는 열기가 흘러 넘쳤다. 그림처럼 이어진 박주영의 패스와 김두현의 통렬한 중거리포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이 황홀한 저녁이었다.
우리 모두가 서로서로를 섬세하게 배려해주던 아름다운 추억. 그렇다. 이것은 4년 전 어느 날의 재현이자 복제다. 35억 아시아 시민의 자존심을 걸고, 거함 독일과 결승으로 가는 외나무 길목에서 역사적 승부를 펼치던 여름밤을 기억하는가. 월드컵 개막전에서 챔피언 프랑스를 1대0으로 잡으며 세계를 경악시켰던 신화. 그래서 세네갈도 성지순례 하듯 상암벌을 다시 찾았을 터이다.
4년 전에 비해 달라진 점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핑크 쪽에서 오렌지 방향으로 미묘하게 이동한 경기복, 흰색 대신 짙은 감색으로 바뀐 등 번호 색깔, 성 대신 이름을 새겨 넣은 등판. 그리고 관중석 전체를 지배하는 분위기. 2002년 준결승의 핵심어는 포만감이었다. 폴란드 전 전야의 숨막히던 긴장감은 미국 전 전후의 안타까움으로 이어지다가 이탈리아 전 연장전을 지나며 화산처럼 폭발했었다. 스페인 전 이후는 보너스였다. 이미 에베레스트 정상과 북극점을 통과했다는 뿌듯함이 대한민국의 영공을 가득 채웠다. 16강 진출의 위업을 달성한 뒤 히딩크는 말했다.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라고. 4년이 지난 2006년 5월의 상암 경기장은 승리와 축구를 탐하는 관중의 함성이 폭포처럼 흘러내리던 용광로였다.
파리-다카르 랠리. 무려 한 달의 세월을 두고 한 조각 지도에만 의지한 채 도시와 사막과 정글을 가로지르는 처절한 레이스. 모든 카레이서들의 꿈이 어려 있는 이 자동차 경주의 결승점인 다카르는 세네갈의 수도다. 한국의 2006년 월드컵 레이스는 다카르로부터 발진하여 유럽 대륙을 향해 힘차게 시동을 걸었나니, 자 이제 바야흐로 축제의 시작이다. 우리 모두는 다시 배가 고프다.
(정원재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본지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