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달 첫 내한하는 벨기에의 명(名) 지휘자 필립 헤레베헤(58)는 대학 시절, 의학과 음악을 함께 전공했다.

정신 의학을 전공한 '예비 의사'였지만, 재학 시절인 1970년에 바흐와 그 이전 시대의 음악을 연주하는 합창단 '콜레기움 보칼레'를 창단한 맹렬 음악도이기도 했다.

의학과 음악. 둘 중에 어느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전화 인터뷰에서 그에게 '왜 의사가 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명쾌했다. "저 말고도 아픈 사람을 돌봐줄 의사는 많았지만, 고음악을 연주할 사람은 저 밖에 없었어요. 제게 음악은 일종의 '사명'이었어요."

다음달 11·12일 서울 LG 아트센터에서 바흐의 'b단조 미사'를 연주하는 그의 별명은 "고음악 운동의 푸르트뱅글러"(뉴욕 타임스). 바로크 시대의 작품을 작곡 당대의 악기나 연주 기법으로 해석하는 고음악 운동은 1970년대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 지금은 어느덧 주류를 위협할 만큼 성장했다. 카라얀 이전에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끌었던 지휘자 푸르트뱅글러와 비교되는 느낌은 어떤 걸까.

"그런 별명이 있는 줄 몰랐어요.(웃음)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흐를 연주하기 시작한 첫 세대였어요. 당시 음악계에선 '혁명'으로 받아들여졌지요. 그런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 아닐까요?"

지휘자와 함께 내한하는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는 오케스트라 29명, 합창단 23명의 단출한 편성이다. 100여명에 육박하는 대형 오케스트라에 비하면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다. '정격 연주' '당대 연주' '원전 연주'로도 불리는 이들의 해석은 음악이라는 거대한 육질(肉質)에서 기름기를 모두 빼낸 듯, 소박하고 담백한 맛을 선사한다.

하지만 헤레베헤는 "고음악 운동에서 '연주를 얼마나 다르게 하는가'보다 더욱 중요한 건 레퍼토리 자체를 끊임 없이 넓혀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바흐의 칸타타 전곡을 녹음하고, 샤르팡티에·륄리·캉프라 등 프랑스 작곡가를 발굴하는 등 "박물관에서 잠자고 있던 악보를 일깨워냈다"는 것이다.

모두가 21세기로 달려가지 못해 안달하는 시대에 유독 음악만은 과거로 회귀하려는 걸까. 헤레베헤는 "음악은 자동차 산업이 아니다"고 비유했다. "차량은 최신 기종이 예전 것보다 우수하게 마련이죠. 하지만 음악에선 쇼팽이 이전 작곡가인 바흐보다 우월하다는 근거가 없어요. 음악에서 진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평생을 바흐에 천착해온 그의 답변은 연주만큼이나 솔직담백했다. 서울 공연 하루 전날 대전문화예술의전당에서 먼저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