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의자에 앉아 눈을 가늘게 뜨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를 알아보는 것 같진 않았다. 같은 백발의 사모님이 목소리를 높여 다시 한 번 나를 소개했다.

"왜 그때 첫 월급 탔다고 초콜릿 사왔던 학생요. 방송국에 다녔잖수."

총기가 대단한 분이다. 얼마나 주변머리 없다고 했을까.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선생님께 초콜릿을 가져가다니. 그래도 선생님은 엷은 미소만 띠고 아무 반응이 없었다. 머리는 하얘도 예의 그 단아하고 말쑥한 모습. 사모님은 내게 선생님의 기억을 되살려 보라고 말하고는 차를 가지러 나갔다.

"왜 라틴, 희랍어 공부 열심히 한다고 절 댁으로 불러 주셨잖아요. 제 밥에 선생님 계란까지 얹어 주셨고요."

선생님은 여전히 빙그레 웃기만 했다. 나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방송국까지 찾아 오셨댔잖아요. 대학원 안 가고 취직했다고 섭섭해 하시면서요. 그때 조지 엘리엇의 소설 '아담 비드' 사다 주신 거 기억 안 나세요? 언제든 손에서 글을 놓지 말라고 하셨는데."

선생님은 그저 오른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나는 필사적이 되었다.

"제가 어려운 일 당했을 때 편지도 주셨어요. 고통을 자기 성장의 계기로 삼으라고요."

나는 무엇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울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고령으로 기억을 놓아버린 나의 대학시절 은사(恩師). 5월 어느 날 오후, 시간은 그대로 있고 선생님과 내가 강물에 떨어진 나뭇잎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내 가슴에 아련한 스승의 흔적만을 새긴 채.
(박찬순 2006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당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