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노래잖아. 힘 좀 빼고!" 13일 오후 2시 경기도 평택시 안중읍 안중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무대를 가득 채운 44인조 오케스트라와 연습하던 할아버지 지휘자의 잔소리가 좀체 끊이지 않는다.
'평택시민을 위한 봄 음악축제'. 평택 안중중고 관악부 동문들이 스승의 날을 맞아 다섯 달 동안 준비한 무료 공연. 갓 스무살부터, 머리가 희끗한 중년들까지 1958년 창단 후 처음으로 모였다.
"우리 48년동안 왜 아직까지 동문합동공연 한 번도 안 했지?" 작년 10월 졸업 동기들 모임에서 정용현(30·클라리넷 강사)씨가 던진 이 말이 이날 연주회의 '씨'가 됐다.
후배들은 그날로 선배들에게 회람을 돌렸다. 음악인, 공무원, 군인…. 다른 삶을 살던 사람들이 몰려 단원 모집은 일찌감치 마감됐다. D-데이는 스승의 날을 앞둔 5월 13일로 잡았고 지휘는 은사들께 맡겼다. 92년까지 19년간 지도했던 김상순(71)선생님도, 99년까지 함께 한 오경열(45·대학 강사)선생님도 흔쾌히 승낙했다.
클라리넷, 호른, 트럼펫, 트럼본…. 악기를 든 '올드보이' 30명이 올해 1월 모교 음악실에 처음 모였다. 그리고는 매주 일요일 모여 연습을 했다. 참석률은 70% 안팎. 이 모임의 최고참 이득헌(45·트럼본) 평택시청 계장은 "7~80년대에 평택에선 우릴 따라올 밴드가 없었어요. 학도 호국단 경연대회에서도 언제나 여학생들에게 '인기 짱'이었죠"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 지나간 추억이었다. 졸업생수가 1980년 8명, 1996년 4명, 2006년 1명으로 계속 줄어든 탓이었다. 지금은 음대 지망생들로 간간이 명맥을 잇는다.
올드 보이들의 열정은 뜨거웠다. 경찰악대 천명기(29)순경은 연습악보를 구해왔고, 대관비, 팜플렛 제작 등 무대 뒷 일은 50대 이상 '큰형님'들이 맡았다. 포스터 붙이기, 현수막 달기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나섰다.
공연 2시간 전인 오후 4시 늦은 점심시간. 제육볶음을 한 상 가득 차려놓고 얘기꽃을 피운 자리에서 김상순 선생님은 "70년대는 잔디밭 그늘에 애들 앉히고 우리는 뙤약볕에서 연주했지. 주변이 벌판이라 다같이 조깅도 하고, 낚시도 갔었어"라고 회상했다.
학생들에게 별명을 곧 잘 붙였던 오경열 선생님은 여전히 장난기가 넘쳐 흘렀다. "홍인표 저 녀석은 얼굴이 가늘어서 모기, 최진현은 몸이 토실토실해서 물방개였지. 우리 얘기가 최민식이 나온 '꽃피는 봄이 오면'보다 훨씬 재밌을 걸?"
연주회에 맞춰 휴가를 받은 트럼펫 이덕진(22·한국예술종합학교 휴학)상병도 "취미로 시작해 결국 전공까지 했어요. 그렇게 반대하던 부모님이 오늘 보러 오신대요"라며 가슴 벅차했다.
'즐기자'고 시작했어도 다들 '흥행'에 신경 쓰이는 표정이다. '농번기인데', '포스터에 '무료'라는 말이 너무 작게 들어간 건 아닌가'라며 걱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부질없는 것이었다. 공연시작 30분전에 이르자 어르신, 꼬마들, 외국 노동자들로 700여 객석이 꽉 들어찼다. 인파 속에는 꽃 파는 아줌마까지 등장했다.
오후 6시. '장미축제'로 공연이 시작됐다. '라 쿰파르시타', '경기병 서곡'에 이어 '잊혀진 계절'과 '헤이 쥬드' 때는 관객들이 같이 합창을 했다. '열린 음악회'가 따로 없었다. 중간에 '스승의 은혜'가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두 선생님들에게 감사패가 주어졌다. 안중중 동문 한기조(58·농업)씨는 "우리 때 관악부 담당하던 고(故) 남상규 선생님이 다시 오신 것 같다"며 감격해 했다.
앙코르곡까지 모두 끝나고 마지막 하나 남은 곡은 교가(校歌). 관객을 보고 돌아선 김상순 선생님의 지휘봉에 객석은 합창으로 응대했다. "마이산과 계두봉 높은 기슭에…". 노랫말이 이어지자 지휘자의 눈두덩은 금세 부풀어 올랐고 뺨에는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