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을 겸해 부모님 결혼 70주년 및 아버님 미수 기념잔치를 위해 투표합시다. ①인천에서 제2결혼 및 가족식사 기념촬영 ②가족동반여행 ③시골 뷔페음식점 잔치 ④시골집 동네사람 초청잔치 ⑤두 분만 황혼여행…."
지난달 29일에 열린 김용규(金龍圭·88·충남 태안군 이원면 도랑골)옹 미수(米壽) 잔치를 벌이기 위해 김씨 가족들이 올린 가족회의 안건이다. 웬만하면 전화 몇 통 혹은 저녁식사로 해결될 사안. 하지만 김옹 가족은 이 글을 인터넷 카페에 올렸다. 어렵사리 계산해보니 1세대 2 명, 2세대 10남매 19명, 3세대 48명, 4세대 28명 해서 가족 총인원수가 97명이다. 신참 사위, 며느리가 모든 가족 얼굴을 익히는 데 평균 5∼6년이 걸린다. 가족회의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외동 딸·아들과 엄마 아빠 달랑 사는 21세기, 전국 방방곡곡에 사는 97명 초대형 가족이 인터넷에 의지해 도란도란 살게 되었다.
인터넷 카페서 모임 공지·청첩장 게시
한번 모이면 고기 100인분·떡 한 가마니
신참 며느리 가족얼굴 익히는데 5~6년
10남매 가운데 막내인 진수(41)씨가 말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큰 가족행사 아니면 보기도 힘들고 서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어요. 가족 숫자 세는 건 어림도 없었고. 그래서 인터넷 카페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지난 2월 만든 카페 이름이 '도란골'. 고향 마을 이름인 '도랑골'과 '도란도란' 살자는 의미를 합쳤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가족모임 공지, 취직소식 알리기, 결혼 청첩장 게시, 고민 상담까지…. 조회수만 벌써 1만 건이다. 인터넷 활동을 하면서 컴퓨터를 배운 가족도 있다. 여섯째인 진영(55)씨는 "원래 컴퓨터에 대해 잘 몰랐는데, 인터넷 카페에 들락거리다 보니 실력이 많이 늘었다"며 "요즘엔 중독됐는지 매일 한 번씩은 꼭 열어봐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카페 메뉴는 아예 세대별로 분류돼 있다.
인터넷 투표 끝에 지난달 29일 인천에 있는 60평짜리 갈비집을 통째로 빌려 가족 80여 명이 모였다. 어버이날 잔치를 겸한 행사였다. 식당 전등을 다 끄고 축하 케이크 위에 촛불 88개를 켜고서 축가를 불렀다. 그리고 손자 그룹 가운데 가장 막내인 찬연(10)이가 대표로 김씨 부부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렸다. 갈비 100인분도 모자랐다. "명절이면 떡 한 가마니는 기본이죠. 2박3일 야유회에 다녀오려면 1000만원이 듭니다."(여섯째 진영씨)
주로 인천, 안산 부근에 모여 사는 가족들은 1년에 한 번 고향 태안으로 놀러 간다. 대절한 관광버스에는 '도란골 여행 나들이'라는 플래카드를 붙인다. 그러면 운전기사는 단체관광객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라고. 그럴 때면 가족사진을 찍는데, 하도 사람이 많아 한 컷에 다 들어가지 않는다.
삼촌보다 조카가 더 나이가 많은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가장 막내인 찬연이는 "식당에서 스무 살 난 조카한테 '조카, 밥 먹었어요?' 하고 물어보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본다"고 했다.
결혼과 생일까지 합치면 경조사는 한 달에 두세 차례가 기본이다. 축의금으로 빠져나가는 돈도 만만치 않다. 5000~1만원씩만 나눠줘도 세뱃돈이 무려 50만원씩 나간다. 막내며느리 장재옥(39)씨가 "제사 일이 너무 힘들다"고 투정하는 글을 올리자 여러 동서들 위로가 쏟아졌다. 친정어머니도 시댁 식구가 많아서 돈이 많이 들어간다며 걱정했다. 재옥씨가 위로에 힘입어 댓글을 올렸다. "경제적으로 손해는 있지만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족 간 우애가 있어요. 부부 싸움을 할 때도 당신 가족들 때문에 내가 참는다고 말해요."
10여 년 전쯤 김옹이 소 뒷발에 치여 뼈가 부러진 적이 있었다. 1년 넘게 병원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근 100명에 이르는 '든든한' 가족들이 조를 짜서 24시간 병원을 지킨 덕에 김옹은 지금도 건강하게 마실을 다닌다.
그 가족이 어버이날을 맞는다. 해마다 어버이날이 되면 부부는 전국에서 걸려오는 안부전화로 정신이 없다. 6월이 오면 사위들이 주관해서 부모님과 함께 어버이날 축하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