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미동초등학교 2학년 4반 교실. 학부모 김태연(36)씨가 교단 앞에서 동화책을 펴 든다. ‘새똥과 전쟁’이란 책이다. “빨간 나라 임금님과 파란 나라 임금님이 산책을 하다가….” 김씨가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안돼 어수선하던 교실이 조용해진다. 교실 출입문에는 ‘책 읽어주기 실시 중’이라는 팻말이 걸려있다. 복도를 지나가는 학생과 교사들에게 조용히 해달라는 의미다. 김씨가 책을 다 읽은 뒤 학생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약 40분이 흘렀다. 김씨는 다음주에 읽을 책 내용을 소개하고 수업을 마쳤다. 옆 교실에서는 황윤정(38)씨가 ‘할머니가 남긴 선물’이라는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다. 황씨는 “아이들의 호응이 좋다. 책을 다 읽으면 내용을 질문하는 학생도 꽤 있다”며 “책은 보통 두꺼운 것은 1권, 얇은 것은 2권을 선정한다”고 말했다.
초등학교부터 독서논술 열풍이 부는 가운데 '책 읽어주기'가 서울지역 초등학교에서 확산되고 있다. 교사와 학부모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수업시간이나 아침시간을 이용해 동화책 등을 읽어주는 운동이다. 독서 훈련에 학교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책 읽는 방법과 습관을 익혀주자는 것이다.
이미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교실 내 '책 읽어주기' 수업이 일반화돼 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도 지난 2001년 9·11테러 당시 플로리다주의 한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책 읽어주기' 인가? 미동초등학교 심영면 교감은 "이제까지 학교에서 실시하던 독서교육은 독후감·독서퀴즈 등 독서능력을 평가하는 프로그램 위주였다"며 "이런 수업은 책을 많이 읽는 아이들에게는 자신감을 주지만 독서에 흥미가 없는 학생들에게는 오히려 좌절감만을 안겨줬다"고 말했다.
미동초등학교가 '책 읽어주기'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은 이처럼 독서에 관심이 적은 학생들에게도 흥미를 키워주기 위해서다. 학교측은 "자녀가 어렸을 때 부모가 책을 읽어주는 것이 중요하듯이 이런 환경이 조성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는 학교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동초등학교가 '책 읽어주기'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은 보름 남짓이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벌써부터 뜨겁다. 2학년 육현수군은 "책 읽어주는 엄마들이 (선물보따리를 가져오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같았다"며 "다음주 시간이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3학년 박건군은 "읽다 남은 부분이 궁금해서 도서실에서 책을 찾아 읽었다"고 말했다.
심 교감은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읽기'보다 '듣기'수준이 더 발달돼 있다"며 "듣기 훈련이 잘 된 학생들은 독서능력과 문장을 이해하는 능력뿐 아니라 학습능력이 더불어 키워진다"고 말했다.
학교측은 '책 읽어주기'운동에 학부모들의 참여를 권유하고 있다. 이런 취지의 가정통신문을 보내자 학부모 22명이 '책 읽어주기 지원단'으로 나선 것이다. 이들은 한 학기 동안 1주일에 한 번씩 학교에 나온다. 시간은 자신이 편리한 시간을 맞추면 된다.
학교측은 "앞으로는 경찰관, 소방관, 정치인 등 '책 읽어주기 교사' 대상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교사들이 아침시간에 '책 읽어주기'를 하고, 고학년생들은 저학년 학급에서 책을 읽어주는 '독서 튜터링' 제도도 도입한다. "미국에서는 인기 프로농구 선수가 초등학교에서 책 읽기 교사로 자원봉사를 해요. 우리도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이경희 교장)
미동초등학교에서 시작한 '책 읽어주기' 운동은 인근 초등학교에도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북성초등학교 구본순 교장은 "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일방적으로 말하고 독후감을 검사하는 독서교육으로는 학생들의 독서습관을 키우기 힘들다"며 "서울지역 초등학교에서 책 읽어주기 운동을 전개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대구지역 초·중·고등학교들은 지난해 '아침독서 10분운동'을 전개해 지역사회에 독서 바람을 일으킨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