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거지홀릭'은, 우거지월드의 개업일에 맞추어 나왔다. 교정을 꼼꼼히 본다고 봤는데 7페이지 12번째 줄에 오자가 있었다. '고향 어머니의 손맛처럼 깊은 맛을 내는' 이라는 부분이 '고향 어머니의 손맛처럼 갚은 맛을 내는'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고민했지만 안 이사에게 순순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누군지 모를 '오은수'를 사칭해서 벌이는 이 첫 번째 프로젝트를 찜찜하게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안 이사가 실눈을 떴다.
"갚은? 돈을 갚았다는 건가, 은혜를 갚았다는 건가?"
"죄송합니다."
"흠. 뭐 할 수 없지. 약속했던 액수에서 좀 깎는다?"
"네? …네."
"아니. 그렇게 풀 죽은 얼굴을 하면 내 맘이 약해지잖아."
"……."
"그것만 빼면 다 괜찮네. 오 사장, 기대했던 것보다 더 똑 부러져."
처음 듣는 오 사장이라는 호칭에 황홀해지기는커녕 오들오들 닭살이 돋았다. 안 이사의 식당은 깔끔하고 세련된 젠 스타일의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우거지 전문 식당이 아니라 이탈리안 레스토랑쯤으로 착각할 만했다.
"개업 집에 왔는데 해장국 한 그릇 먹고 가야지?"
거절할 새도 없이 그가 나를 붙들어 앉혔다. 남의 영업집에서 "사실은 제가 우거지를 별로 안 좋아해서…"라고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우거지 해장국이 곧 나왔다. 눈을 딱 감고 국물 한 숟가락을 떴다. 뜨끈하고 구수한 국물이 입안을 보드랍게 휘감았다. ……맛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항상 우거지를 싫어한다고 생각해왔다. 우거지 된장국, 우거지 갈비탕, 우거지 나물 등등 우거지가 들어간 음식을 일부러 시켜 먹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우거지의 참 맛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단한 채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오늘 부로, 싫어하는 음식 리스트에서 우거지를 슬며시 빼야겠다. 사람은 이렇게 조금씩 변해가는 걸까.
"어때?"
안 이사의 표정에 조바심이 그득하다. 나는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최고예요."
안이사가 아이처럼 환히 웃었다.
"참, 어떻게 됐어? 그때 그 청년하고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겠다. 그는 대충 알 만하다는 듯 혀를 찼다.
"지금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가만 있어봐. 저기 저쪽에 안경 쓴 친구 보이지? 여기 인테리어 맡아 해준 사람인데, 나이가 서른 몇이라더라? 어때, 관심 있으면 한번…."
안 이사가 턱짓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언뜻 보기에 반듯하고 단정한 인상이다. 일단은 냅킨으로 입가를 넌지시 눌러 닦았다. 그때 눈치 없게 전화벨이 울렸다. 유희였다.
"야, 유준이 소식 들었어?"
그녀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다급하다.
"아니, 왜?"
"쓰러졌대."
"뭐?"
"잔말 말고 빨리 뛰어 와."
해장국을 반이나 남기고 일어섰다. 유희가 알려준 병원 복도에서 재인과 마주쳤다. 그녀 역시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달려왔다고 했다. 병실 문을 열었다. 침대 위의 환자는 흰 시트를 머리꼭대기까지 덮은 채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정신이 혼미해져 왔다.
"유준아!"
재인과 나는 동시에 소리쳤다.
"엉?"
유준이 시트를 젖히고 부스스 깨어났다.
"뭐야? 죽은 줄 알았잖아."
재인은 그새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웬 난리들이야?"
유준의 병명은 과로로 인한 복통과 탈진이라고 했다. 어느새 들어온 유희가 한마디 던졌다.
"남유준과 과로라니. 부시맨과 콜라, 햄버거와 막걸리처럼 끝장나게 언밸런스한 조합이다."
"아이 씨. 그냥 쉬려고 꾀병 부리는 중이라니까."
유준이 정색을 하고 반박했다. 아마도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꾀병이 통할 나이는 진즉에 지나 버렸으므로. 병실의 작은 창 너머로 병원 앞뜰이 내려다보였다. 어느새 홀연히 져버린 연분홍 꽃잎들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꽃은 왜 질까?"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얼굴빛이 완연히 핼쑥해진 유준이 짐짓 장난스럽게 흥얼댔다.
"세월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그래. 조용필!"
갑자기 유희가 손뼉을 쳤다.
"어쩜 좋냐. 용필 아저씨 노래가 귀에 박히는 순간, 진정한 대한민국 중년이 되는 거라던데."
"중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어쩐지 저항하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