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차별적으로 범행 대상을 선정한 뒤, 불과 몇 만원을 뺏고 완전범죄를 위해 쇠망치로 피해자들의 머리를 내리치고 불을 지른 '엽기 살인범' 정남규(37·인천시 부평구)가 붙잡혔다.
"부자(富者)를 보면 죽이고 싶다"는 범인은 정작 침투가 쉬운 서민층 주택을 대상으로 삼았고, 이 가운데에는 장애인 시설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회에 대한 삐뚤어진 증오심은 대상을 구별하지 않았다. 18세의 여고생부터 47세의 주부가 설명되지 않는 살의(殺意)의 피해자였다. 지난 2년간 8건의 범죄에서 5명을 살해하고, 8명을 중태에 빠뜨렸다.
◆엽기 살인 행각
지난해 10월 19일 오전 5시20분 관악구 봉천동 연립주택 지하방. 정씨는 방에 들어가 몇 만원을 훔친 뒤 피해자 변모(여·26)씨가 깨어나자 쇠망치로 수차례 때려 살해했다. 이어 라이터로 이불에 불을 붙인 후 쇠 젓가락을 문고리에 걸어 휘어놓아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옆방에 있던 변씨의 오빠(29)가 깨어나자 쫓아 들어가 망치로 때려 중태에 빠뜨렸다.
정씨는 올 들어서도 지난달 27일 오전 4시50분쯤 서울 관악구 봉천동 김모(55)씨의 단독주택에 들어가 작은 방에서 자고 있던 김씨의 세 딸을 둔기로 때리고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이 사고로 김씨의 첫째 딸(24)은 그 자리에서 숨졌고, 장애인인 둘째 딸(20)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중학생인 김씨의 셋째 딸(16)은 두개골이 함몰되는 중상을 입었다. 경찰에서 진술한 것만 2004년 3건, 2005년 3건, 올해 2건의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원정 범죄
범행 대상에는 계통이 없었지만, 범행 후 잡히지 않으려는 계획은 교묘했다. 인천에 사는 정씨는 용돈이 떨어지면 오후 10시쯤 지하철을 타고 서울로 이동해 서울 개봉동이나 가리봉동 등에서 내렸다. 정씨는 경찰에서 "직장도 못 구하고 결혼도 못해 화가 나 부자만 보면 죽이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강남구 등 부유층이 사는 곳엔 CCTV가 많이 설치돼 있어, CCTV가 없는 신길동이나 봉천동, 시흥동 등을 범행장소로 택했다. 그는 범행 장소를 물색한 후 새벽 시간대에 범행을 저지르고, 지하철을 타고 귀가했다.
전북의 빈농(貧農) 가정에서 태어난 정씨는 가족과 함께 인천으로 이주한 후 도시 빈민 신세를 면치 못했다. 경찰은 어렸을 때부터 내성적이었던 정씨가 대인기피증 등 성격에 따른 사회 부적응 문제와 경제적 궁핍이 겹쳐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시민이 검거
정씨는 22일 오전 4시40분쯤 서울 신길동 김모(24)씨의 지하 주택에 들어가 자고 있던 김씨의 머리를 둔기로 때리고 금품을 훔쳐 달아나다 김씨의 아버지, 친구와 격투 끝에 붙잡혔다. 그러나 정씨는 오전 5시30분쯤 112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수갑을 채우고 경찰차에 태워 연행하려는 순간 경찰을 밀치고 달아났다. 그러나 정씨는 동네 주민 이모(39)씨의 신고로 현장에서 10여m 떨어진 곳에서 도주 2시간15분 만에 다시 경찰에 붙들렸다. 결국 시민이 '살인기계'를 붙잡은 셈이다.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24일 정씨를 강도·상해 혐의로 구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