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도 다녀간 적 있는 프랑스 사회학자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simulation·모사·模寫)의 사회논리로 유명하다. 시뮬라시옹은 사물의 효율성이나 기능성보다 기호와 상징성이 우리의 삶을 더 강력히 규정하는 후기산업사회의 특징을 묘사하는 개념이다. 고도화된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은 물질적 실체이기 전에 기호이며, 기호로서의 사물은 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가 앞선다는 것이다.
난해해 보이는 시뮬라시옹의 논리를 실제 사례에 대입해 보자. 예컨대 청량음료를 마실 때 소비자가 맛 그 자체를 마시는 것일까? 보드리야르 식으로 설명하자면 우리는 멋진 청춘남녀들이 등장해서 엮어내는 현란한 음료광고의 이미지, 즉 기호를 소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미지로서의 청량음료를 마시는 것이다. 상품의 기호화 현상의 극단적 형태는 더 비싸기 때문에 오히려 잘 팔리는 사례에서 발견된다. 수십만원이 넘는 명품 청바지가 품질차이가 거의 없는 저렴한 제품에 비해 더 잘 팔리는 현상을 보라.
상품의 기호화 현상이 더 진행되면 제품의 이미지가 콘텐츠를 압도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원본/모사의 구분법이 파괴되고 만다. 그 결과 모사물이 진품보다 더 진짜처럼 보이는 시뮬라시옹의 시대, 이미지 전성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이런 시뮬라시옹의 사회논리는 우리 정치 현실에 대해서도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5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미지 정치가 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 정치는 매스미디어가 정치에 미치는 힘이 구조화되면서 생겨난 대중사회적 현상인데, 이것이 여론정치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여당의 지지도 약세라는 현실을 압도적으로 상쇄하는 강금실 열린우리당 서울시장 예비후보의 인기는 시뮬라시옹의 사회논리를 입증한다. 강 후보의 깨끗하고 색다른 이미지가 정치소비자들로부터 큰 호감을 사고 있기 때문이다. 강 후보는 제도정치권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인권변호사와 장관시절의 청신한 행보와 '자유인 강금실'의 이미지를 적절히 연결해 인기몰이에 성공하고 있다. 보랏빛 희망의 정치를 표방한 강 후보의 출사표가 화사한 일인극의 형태로 진행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시뮬라시옹의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감성 문법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것이다.
'강금실 돌풍'에 맞서 급조된 한나라당의 오세훈 카드도 상황은 비슷하다. 시민운동과 개혁적 의원활동의 행로가 TV 토론프로 사회자 시절의 이지적이고 부드러운 인상과 맞물리면서 오세훈 예비후보의 인기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두 사람의 지지도가 박빙 상황인 것도 매우 시사적이다.
시뮬라시옹의 사회논리에 의해 견인되는 이미지 정치의 범람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고 이는 경청할 만한 지적이다. 이성적으로 해부되어야 할 콘텐츠, 즉 정책이나 자질은 간 데 없고 감성에만 호소하는 선거 전략이 위태롭고 천박한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들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구성된' 시뮬라시옹의 세계를 현실 그 자체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를 일방적으로 비판만 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 정치의 동역학을 냉철하게 바라보면서 그 콘텐츠를 엄정하게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다.
비싼 상품을 살 때 소비자들이 꼼꼼하게 품질을 따지며 비교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5만여 공무원과 연 15조원의 예산을 쓰는 서울시 수장을 뽑을 때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하는 것은 정치소비자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덕목이자 의무가 아닐 수 없다. 명품을 사지 않더라도 최소한 짝퉁을 충동구매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 스스로와 나라를 같이 살리는 길이다.
(윤평중 · 한신대 교수 · 사회철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