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점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점쟁이는 동쪽으로 가면 귀인이 나타난다고 했다. 솔깃해지는 동시에 아쉽기도 했다. 동쪽으로 가면 서쪽 남쪽 북쪽은 어떡하라는 거지? 기회란, 동서남북 사방에 모래알처럼 그득그득 널려있는 건 줄로만 알았으므로 나는 오만하게 투덜거렸다.

드시 지금 선택할 필요는 없잖아?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에 묻어나던 자신감의 그림자를 기억한다. 골라야 할 품목이 너무 많아 질식해 버릴 것 같다고, 선택을 미루는 것이 나의 선택이라고 지껄여댈 때에도 역시 그 말들 속에는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확고한 암시가 전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착각의 거울이 와장창 깨져버린 지금, 사방이 가로막힌 광장 한 가운데 갇혀 있는 느낌에 나는 부르르 몸을 떤다. 이대로 조금 더 지체했다가는 안주머니 가장 깊숙한 곳에 감춰둔 마지막 패 하나마저 시효를 잃을 것이다. 꽁꽁 숨긴 그 마지막 패의 이름이, 정말로 '결혼'인지는 묻지 마시라. 인생이란 어차피 불분명한 게임이니까. 과감히 질러야 할 순간을 헤아리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터질 것 같다.

-결혼은 결국 타이밍의 문제겠지?

메신저에서 만난 유희에게 슬쩍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걸 이제 알았니. 나랑 용가리를 봐. 둘이 아무리 사랑하면 뭘 해. 인생의 결정적인 타이밍을 절묘하게 비껴서 만나면, 딱 요 모양 요 꼴이 되는 거야.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태초에 한 몸이었던 잃어버린 반쪽과 천신만고 끝에 조우했다 치자. 그런데 그때 나이가 열다섯 살이거나 마흔아홉 살이라면 어쩔 것인가. 여자에게는 의처증 남편이 있고 남자에게는 부양해야 할 다섯 자식이 있다면? 신의 장난은 종종 짓궂고 잔인하다.

-그럼 결혼을 위한 결정적 타이밍은 언제일까?

-여러 가지 연때가 맞을 때겠지. 마침 결혼이 하고 싶어지는 순간에 결혼할 만한 조건의 남자가 나타난다든지. 딴 애들 결혼하는 거 보면, 꼭 가장 사랑했던 남자랑 결혼하는 건 아니더라. 연때가 맞는 남자랑 하지.

혹시 모든 선택의 기회를 박탈당한 기분이 드는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역설적으로 나의 운명적 연때인 것은 아닐까. 나는 희망을 담아 빠르게 타이핑했다.

-여러 가지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남자와, 평화롭고 무난하게 사는 결혼생활도 괜찮지 않아?

-오은수. 너 설마 결혼이라는 제도에 아직도 판타지를 품고 있는 거야? ㅋㅋ

문장 뒤에 붙인 'ㅋㅋ' 가 아무래도 비웃는 것처럼 보여 힘이 빠졌다. 비웃어도 할 수 없다. 나한테는 이 견고한 사회제도를 거스를 만한 용기가 없었다. 하긴 용기를 쥐어짤 건더기가 있어야 말이지.

-아냐. 결혼이 현실이라는 것, 잘 알아. 그래서 그러는 거야. 내가 갈 수 있는 제일 현실적인 길이 뭔지를 생각하는 거라고.

-재인이 결혼이 그렇게 빠그라지는 거 보고도 그래?

-그건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른 거 아닐까.

-너, 영수씨랑 결혼하고 싶구나?

나는 침묵한다. 담담한 인정의 표현이었다.

-결혼하재?

-아직 구체적인 얘기를 한 건 아니고….

-뭐야, 그럼? 또 너 혼자 김칫국 먼저 마시고 있는 거 아냐?

-앗, 유희야 미안해. 갑자기 누가 왔나 봐. 나중에 전화할게.

나는 엔터 키를 누르는 동시에 컴퓨터의 파워 버튼을 눌렀다. 피유-소리를 내며 모니터에 불이 꺼졌다. 김영수라는 남자. 처음부터 열정적인 사랑에 홀딱 빠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창호지 문살에 은은히 스며드는 햇살처럼 우리의 관계는 온화하게 유지되어 왔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렇지만 곰곰이 생각해볼수록 이상했다. 영수는 지나가는 말로라도 결혼 비슷한 화제를 꺼낸 적이 없었다. 우리가 맞선을 통해 만났으며, 둘 다 이른바 결혼 적령기를 휙 지나가고 있는 나이임을 상기해볼 때 더욱 의문스러웠다. 어쩐지 그는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는 남자 같지 않다.

그에게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과연 어떤 사이죠?" 아니면 "영수씨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어요?" 아아, 그러나, 그가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면? 수치스러워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쨌든 치밀한 계획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