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東京)시 스기나미 구에 위치한 도립(都立) 니시(西)고. 수학 수업을 마친 2학년생 사카이 순스케(板井 駿介·16)군이 피곤한 표정으로 교실 문을 나섰다. "진도가 너무 빨라요. 모두들 따라가기 버거워 합니다." 목표 대학을 묻자 사카이군은 금세 눈빛이 달라지며 "당연히 도쿄대"라면서 "어떻게든 버텨볼 생각"이라고 했다. 이 학교 학생들은 영어·수학 시간이 끝나면 파김치가 돼서 나온다. 실력에 따라 상·중·하 등 3개로 나눠 진행하는 수업은 수준이 장난이 아니다. 각 반에서 제일 잘하는 학생에 맞춰서 수업을 한다.
이 학교의 가키조에 마사유키(枾添 賢之·58) 교장은 "뒤처진 학생에 맞춰 우수 학생에게 손해를 줄 수는 없지 않으냐"며 "개인별 능력 차이를 무시하고 똑같이 가르치는 건 옳지 않다"고 말했다.
1960년대 120여명을 도쿄대에 합격시키며 전국 1, 2등을 다투던 명문 공립 '니시고'. 그러나 30여년이 지난 지금의 니시고는 도쿄대 합격생 수가 예전의 10분의 1 수준(10~20명)인 초라한 입시성적표를 내고 있다. 니시고가 강도 높은 수준별 수업을 진행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39년 전인 1967년, 일본 정부는 공립학교를 대상으로 추첨식 입학제도인 평준화 정책(일명 '종합선발제')을 전격 도입했다. 지나친 입시경쟁과 고교 서열화를 막는다는 게 명분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명문 공립고의 대(大)몰락으로 나타났다. 반면 '평준화' 적용에서 벗어난 사립고는 인재들을 쓸어 담으며 승승장구했다.
과거 1등 명문고였던 도쿄 도립 히비야(日比谷)고교를 보자. 히비야고는 한때 195명을 도쿄대에 진학시키는 등 평준화 이전엔 도쿄대 진학자 수가 가장 많았지만, 차츰 서열 순위에서 사라져갔다.
1964년 도쿄대 진학자 수가 127명으로 히비야고(181명)에 이어 2위를 달렸던 니시고도 마찬가지. 1979년엔 도쿄대 진학자 수가 45명으로 급감(13위)했고, 10년 뒤인 1989년엔 20위권 밖으로 밀렸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명문 공립고를 가장 많이 품었던 도쿄도가 정부의 평준화 정책에 반기(反旗)를 들고 일어났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것이다.
도쿄도 교육위원회는 지난 2001~02년 히비야·니시 등 옛 명문 공립고 7개를 진학중점학교로 지정하는 등 공립고의 옛 명성 회복에 시동을 걸었다. 평준화 정책의 빗장을 풀고 재정지원은 물론 '실력파' 교원 배치 등 아낌없는 지원을 통해 '공립 명문고'의 집중 육성에 나선 것이다. 평준화 제도에 불만을 품고 있던 도쿄 도민들도 환영했다. 도쿄도 교육위가 2001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도쿄 도민의 80%가 진학중점학교 지정에 대해 '바람직하다'고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물론 일본교원노조 등 일부 세력들은 평준화 깨기 작업을 "학교를 다시 서열화하는 것"이라고 반대했지만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2004년 말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학업성취도 국제비교(PISA)에서 일본 고교 1학년 수준이 급락(수학 1위→6위, 읽기 8위→14위)한 평가결과는 일본을 경악시켰다. 더 이상 학력저하를 좌시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졌고 '평준화를 지키자!'는 구호는 쑥 들어갔다.
도쿄도 교육위에 부응하기 위해 히비야고는 3대 난관대(難關校: 진학이 어려운 국립명문대로 도쿄대, 교토대, 히토쓰바시대를 말함)에 연간 30~50명 이상 보내는 것을 목표로 진학률 높이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주요 교과는 수업 시간을 90분으로 늘렸다. 또 젊고 유능한 교사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교원 공모제를 실시했다. 수업의 질을 높이기 위해 학생이 일주일에 두 번 수업을 평가하도록 하고 있다. 여름방학(30일)에는 주요 과목당 100강좌씩 별도 수업을 진행한다.
비록 아직 7개 학교에 불과하지만 도쿄도 교육위가 고교 평준화 이전의 경쟁체제 도입을 허용하며 적극 지원하는 분위기 속에서 지바(千葉)현 교육위도 현립(縣立) 지바고 등 5개 공립고를 진학중점학교로 지정하고 나섰다. 지바고는 종전에 없던 자체 입학시험을 도입해 우수학생 선발에 나서고 있다. 오노 게이조(大野敬三·59) 교장은 "학교가 원하는 것은 실력 좋은 학생이며 인재를 많이 뽑기 위해 시험문제 출제에도 6개월을 투자한다"고 말한다.
이뿐이 아니다. 아이치(愛知)현 오카자키(岡崎) 고교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제외하고 한 학기에 4~5번의 실력 테스트를 실시한다. 학교가 자체 편성한 과외 수업시간이 1주일에 32시간이나 된다.
다카오카 마사유키(高岡正幸) 지바현 교육위 학력정책실장은 "우수한 학생을 배려하지 않고서는 학력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며 "지역민들이 희망을 갖고 공립학교에 우수학생을 보내도록 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