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한 듯 무대는 가파르다. 무대 앞쪽엔 옹기종기 술독들이 묻혀 있다. 느릿느릿 걸어나오는 노인. 윤문식이다. 책을 펴고 부싯돌로 불을 붙이려는데 허탕이다. 조명실을 향해 퉁명스레 쏘아붙인다. "여기 불 좀 줘!"
극단 미추 창단 20주년을 기념하는 연극 '주공행장'(酒公行狀)은 이렇게 열린다. 마당놀이는 아니지만 관객의 존재를 의식하긴 마찬가지다. 70번째 생일을 맞은 노인 국주호(윤문식)가 한쪽 구석에 앉아 옛날 이야기처럼 자기 행장을 읽어내려가면 경사진 무대로 출렁출렁 과거가 떠밀려 온다.
조선 영조 때 길고 혹독한 금주령, 그리고 술 한 잔에 목숨 건 사내의 이야기다. 술 기운 떨어지자 세상이 소란하다. 손을 떠는 화가, 절과 빨래터 풍경이 재미있다. 술독을 통해 등·퇴장하는 아이디어, 왕과 신하들의 술자리에선 연출이 빛난다.
'벽 속의 요정' '빨간 도깨비' '마당놀이 마포 황부자' 등을 통해 믿음직한 각색 솜씨를 보여준 작가 배삼식의 신작이다. 굵고 힘있는 드라마라기보다는 술을 소재로 한 단편에 가깝다. '미스테리 사극 코미디'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손진책이 연출하고 윤문식 김종엽 정태화 이기봉 등이 출연한다. 26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1만5000~3만원. (02)747-5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