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봄, 뉴질랜드계 투자펀드 '소버린'이 SK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면서 내뱉은 첫마디가 '주주를 위한 개혁'이었다. 방만한 황제경영을 해오다 분식회계 사태로 휘청거리는 재벌 오너를 향해 주주의 이름으로 일격을 가한 것이다. 이후 SK는 소버린의 공격에 시달렸고, 그 과정에서 소버린은 대머리 독수리 같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 투기자본으로 찍혀 온갖 욕설을 들었다. 그리고 작년 7월, 소버린은 SK주식(지분 14.8%)을 모두 팔아 8000여억원의 차익을 남겼다. 그때도 한국을 떠나는 소버린의 뒤통수를 향해 "단물만 빼먹고 간 투기자본"이란 비난이 쏟아졌다.
이후 개방론자들 사이에 '소버린이 남긴 것'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소버린에 큰절을 해도 모자란다. 최 회장이 진정한 경영인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소버린 덕분이다. 회사 체질도 완전히 달라졌다. SK 주주와 종업원이야말로 경영권 분쟁의 최대 수혜자다."
개방론자들은 SK경영권 분쟁의 손익계산서를 조목조목 제시한다. 우선 소버린은 2003년 3~4월 1760여억원을 투자해 SK주식을 매입했고, 2년4개월 만에 9320여억원에 되팔아 7556억원의 시세차익을 올렸다. 여기에 배당금까지 합하면 8000억원이 넘는 수익을 가져갔다.
소버린이 거액을 챙겼다면 SK주주들도 마찬가지로 떼돈을 벌었다는 게 개방론자들의 설명이다. 소버린이 SK를 공격하는 동안 SK주가는 5.2배나 뛰었다. 정유사 평균 주가 상승폭(2.5배)을 훨씬 넘는 기록이다. 덕분에 SK의 다른 주주들도 2조5000억원 이상 차익을 얻었다는 얘기다.
소버린은 한국에서 돈을 가져갔지만, SK는 돈은 물론 그보다 소중한 '기업'을 얻었다. 불안했던 재벌 2세 체제가 이사회 중심으로 탈바꿈했고, 이사회 내 사외이사 비율이 70%에 달할 만큼 투명성이 높아졌다. 지금 SK는 국내 정유업계의 압도적 리딩 기업으로 순항하고 있다. 소버린과 싸우느라 경영진은 엄청난 고통을 겪었지만, 지금 주주와 직원들은 단 열매를 맛보고 있다.
지난달 초부터 KT&G의 주요 주주(지분율 6.59%)인 미국의 기업 사냥꾼 스틸파트너스와 칼 아이칸 연합세력이 이사회 참여 및 유휴자산 처분을 요구하며 KT&G 경영진을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다. KT&G 내부에선 "재수없이 소버린 같은 놈에게 걸렸다"는 반응이 나온다. 하지만 시장에서 보는 시각은 다르다. 한 펀드의 대표이사는 "아이칸 덕분에, KT&G가 묻어둔 (부동산 등) 유휴 자산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지금 주주들은 (유휴자산의 활용을 통해) KT&G의 가치가 더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을 굿 뉴스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2002년 말 KT&G를 민영화하면서 국내외에 4~5%씩 지분을 분산 매각해 '주인 없는 기업'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후 옛 담배인삼공사 간부들이 KT&G의 신흥 지배세력을 형성했지만, 과거 정부가 만들어준 면허사업의 기득권에 안주한 채 경영혁신을 외면해왔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 약점을 아이칸 연합이 파고든 것이다. 앞으로 KT&G 분쟁은 6개월이 걸릴지, 1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괴로운 쪽은 외부세력과 싸워야 하는 KT&G의 경영진이지, 주주들이 아니다. 벌써 주가가 한달 사이 4만5000원에서 5만5000원대로 뛰었다. 막 시작된 KT&G 분쟁에서, 주주들은 SK에게 약(藥)이 된 '소버린 효과'의 가능성을 엿보고 있다.
(윤영신 경제부 차장대우 ysyoo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