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상품.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 안타 신기록을 84년 만에 바꾼 세계적인 스타의 눈망울이 그렁그렁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5일 일본 도쿄돔의 기자회견장에 들어온 스즈키 이치로(시애틀 매리너스)는 침통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리고는 팀 분위기를 묻는 일본 기자들에게 짧게 내뱉었다. "굴욕적이다!"
이치로는 이번 '야구월드컵'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대회에서 일본팀의 주장을 자임했다. 같은 메이저리그 스타 마쓰이 히데키(뉴욕 양키스)와 이구치 다다히토(시카고 화이트삭스)가 대회 불참을 선언했지만, 이치로만은 달랐다. "일본 야구가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며 동료들을 독려했다.
후쿠오카 전지훈련 도중엔 "상대가 앞으로 30년 동안 일본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겠다"는 발언으로 한국과 대만을 자극하기도 했다. 일본 언론도 이치로의 장기인 빠른 발과 탄탄한 수비를 일본 팀의 특징으로 내세우며 '스몰 베이스볼'로 세계 1위에 오르자는 구호를 떠들어 댔다.
하지만 이날 저녁 한국전의 결과는 일본의 2대3 패배. 도쿄돔에 모인 5만여 일본 관중들은 그가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한목소리로 "이치로~!"를 외치고 플래시를 터뜨리며 열광적인 성원을 보냈지만 그는 성원에 보답하지 못했다. 9회 말 마지막 공격에서도 일본의 마지막 타자로 나와 박찬호의 강속구에 유격수 뜬공으로 물러났고, 일본 관중들은 굳은 얼굴로 서둘러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이치로의 이번 대회 성적은 3경기에서 13타수 3안타. 타율 0.231. 세계적인 안타 제조기로서의 명성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적이었다.
이치로는 기자들이 자신의 부진에 대한 이유를 묻자 "대답하지 않겠다"며 불편한 심기를 노출했다. "많은 관중 앞에서 몸이 뜨거워졌다. 오랜만에 이런 기분을 느꼈다"며 일본 대표로서의 자부심을 드러냈지만 "내 자신의 결과에 만족한다면 야구를 때려치워야 할 것"이라며 자책하기도 했다.
그래도 스타로서 마지막 매너는 지켰다. 한국 투수들에 대해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한 선수들이 많아서인지 자신감이 좋다"고 평했다. 또 "평소 문화가 다른 미국에서 고독과 싸우면서 플레이하다가 한국 대표로 결속된 상태에서 플레이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본이 자랑하는 또 한 명의 야구 스타 왕정치(일본명 오 사다하루) 감독. 전날 한국전 필승을 다짐했던 그는 경기가 끝난 뒤 더그아웃에서 홀로 쓸쓸하게 한국의 간판 스타 이승엽의 인터뷰를 지켜봐야 했다. 통쾌한 일본에서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