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광통교 부근 한화빌딩 옆 길가에 조그만 표석이 하나 있다. 오가는 사람들 중 '조선광문회 터'라고 쓰인 이 보잘것없는 표석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언제부턴가 주변엔 쓰레기까지 쌓이기도 한다. 87년 전 온 겨레를 뒤흔들었던 3·1운동의 거사(擧事)를 잉태했던 현장이 이렇게 사람들 발길에 차이며 잊혀 가고 있다.

1920년 2월 백암 박은식(나중에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냄)은 문하 최남선을 앞세워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창설, 국학 서지 출판에 힘썼다. 그러나 나라가 끝내 일본에 강점되어 탄압이 극렬해지자, 망명을 결심한다. 열아홉 살의 육당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선생님, 꼭 떠나셔야 합니까? 이곳에도 하실 일이 태산 같은데 저희들은 누구에게 가르침 받아야 합니까?"

"육당, 조선광문회를 부탁하네. 자네는 안에서 힘쓰고 나는 밖에서 힘을 보태, 광복의 그날 다시 만나세."

서울 중구 삼각동 22의 1번지, 청계천 굽은다리 옆 '파랑2층집'에 조선광문회 문패를 내걸자, 8도 지식인 수백명이 모여들었다. 주시경 장지연 김택영 현채 오세창 박한영 정인보 이광수 변영만 한용운 권덕규 고희동 이병기 이상협 이갑성 염상섭 현진건 손재형 현상윤 이승훈 남궁억 양기탁 안창호 안재홍 김두봉 조만식 홍명희 등이 그들이었다.

조선광문회는 '동국통감' '율곡전서' '삼국사기' 등 300여 종을 복간하고 최초의 우리말 '말모이'(큰사전)를 편찬한 우리나라 신문화의 요람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백성이 민족혼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선조들의 정신이 담긴 책을 간행, 보급하는 일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젊고 혈기왕성한 지식인들에게 조선광문회는 고전 간행을 핑계로 자연스럽게 모여 시국에 관한 생각들을 나눌 수 있는 고급 살롱이었다. 이곳에 있는 외국 신문 잡지들을 통해 김규식이 참가한다는 파리강화회의,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론, 이승만 안창호 등의 구미(歐美) 독립운동활동, 도쿄유학생2·8독립선언 등을 알게 된 지식인들은 자연히 국내에서의 항일 민족운동을 꿈꾸게 됐다. 1919년 2월 마침내 천도교·기독교·불교가 참여, 거족적 도모를 하게 된다.

최남선이 3·1운동 독립선언서를 구상한 곳이 바로 조선광문회였다. 그가 우미관 광고지 뒷장에 쓴 독립선언서는 손병희 오세창이 검토하고 최린의 집 안방 거문고 속에 감추었다. 나중에 선언문 서명 순서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을 때 남강 이승훈이 탁상을 치며 일갈했다.

"이건 죽는 순서야! 아무나 먼저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

모두들 숙연, 마침내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 조선광문회에서 태동한 독립의 꿈이 "대한독립만세!" 함성으로 만방에 울려 퍼졌다. 이를 상해에서 육당으로부터 전갈받은 백암은 그 감격을 웅혼의 역저 '독립운동지혈사'에 쏟아넣었다.

오늘 조선광문회를 기억하는 사람이나 청계천변 그 건물이 있던 자리를 기억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광문회가 있던 자리 근처에는 청계천 복원을 기념해 베를린장벽 소공원이 만들어졌다. 청계천 광장에는 또 35억원을 들여 올덴버그의 팝아트 조형물을 설치키로 했다고 한다. 정부는 과거사 운운하며 잘도 들춰내면서 정말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은 외면하고 있다.
(고정일·'동서문화' 발행인)

▲ 1일자 A31면 시론 ‘3·1독립운동과 조선광문회’ 내용 중 조선광문회가 ‘1920년 2월’ 창설된 것으로 나와 있으나 이는 ‘1910년 2월’이 제작상 실수로 잘못 표기된 것이기에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