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안전보장회의(NSC) 외교기밀 문서 유출 사건은 현재 진행 중인 정부 내 강경자주파 대(對) 온건자주파 대립의 뿌리를 보여주고 있다. 문서 유출자로 적발된 청와대 이종헌 행정관은 지난 대선 때 외교부 내에서 노무현 후보를 적극 지지해 ‘외교부 노사모’로 불렸다. 미국에 대해 우리의 자주적 국익을 강조하는 이른바 ‘자주파’로 분류되며 “그중에서도 특히 강경한 ‘탈레반 3인방’ 중 한 명”이라고 외교부 관계자는 말했다.
◆노 대통령 적극 지지자
이 행정관은 90년대 말 외교부 통상교섭본부장 보좌관으로 있으면서 한 모임에서 노 대통령을 처음 만났다. 그 자리에서 노 대통령과 외교부 개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가까워졌다고 외교부 직원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그를 잘 아는 학교·외교부 동기생들은 "일찍부터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소신 지지파였다"며 "외교부 내 게시판에 노 대통령 집권의 당위성을 호소하는 글을 올려 문제가 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런 인연으로 이 행정관은 지난 2003년 노 대통령 취임 당시 외교부에서 파견된 정권 인수위원회 멤버가 됐고, 청와대 내의 NSC전략기획실을 거쳐 현재 의전비서관실에서 일하고 있다.
◆외교부 내 갈등
외교부 내엔 북미국과 조약국 간의 오랜 갈등관계가 있다. 다른 나라에선 외교부에서 조약국이 핵심 부서인 경우가 많지만 우리 경우엔 북미국이 핵심이다. 이로 인한 뿌리깊은 경쟁과 견제 심리가 있다.
북미국은 전통적으로 동맹국인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한다. 협상 과정에서 일정 부분 양보도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래서 동맹파로 불린다. 하지만 조약국은 법조문을 따지고 '자주적 이익'을 강조하는 전통이 있다. 2003~2004년 초 한·미 간 동맹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빚어졌던 '자주파'와 '동맹파' 갈등 때 조약과장이 바로 이 행정관이었다.
당시 자주파와 동맹파 대결은 윤영관 장관이 물러나고 북미국 핵심 직원들이 자리를 떠나는 등 자주파의 승리로 끝났다. 그때만 해도 이종석 당시 NSC사무차장이 장악했던 NSC는 자주파로 취급됐다.
하지만 용산기지 이전과 주한미군 재편, 한미 동맹 재조정 등을 거치면서 이종석 NSC 차장도 강경 자주파들에게는 '친미'로 찍히는 상황이 됐다. 노회찬 민노당 의원 등이 용산기지이전 협상문서 등 외교기밀 문서를 폭로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대통령 통역 담당이 문서 최초 전달
청와대 조사에 따르면 이 행정관은 지난 1월 23일 청와대 제1부속실 이성환 행정관으로부터 NSC 상임위 회의록 복사본을 "업무에 참고한다"며 전달받았다. 제1부속실은 노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곳이며, 이성환 행정관은 대통령 영어통역을 맡고 있다. 이태식 주미대사의 아들이기도 하다. 이성환 행정관은 이 문건에 접근할 권한이 없는 이종헌 행정관에게 문건을 건넸다.
이종헌 행정관은 1월 말 서울 한 호텔에서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을 만나 이 회의록을 보여줬고, 최 의원은 현장에서 그대로 받아 적었다. 이 행정관은 청와대 조사에서 "최 의원이 참고자료로 쓰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최 의원은 2월 1일 이 회의록을 폭로하면서 이종석 NSC차장을 비판했다. 청와대의 문서 유출자 조사가 계속되자 이 행정관은 이번 주 초 자백했다.
◆NSC도 친미(親美)로 생각
이번에 문제가 된 한·미 간 전략적유연성 협상에 대해 이들 강경자주파들은 "한국 방위만을 전제로 주둔하는 주한미군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어긴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2003년 용산기지이전협상 당시도 "외교부 북미국이 미국의 이익을 위해 협상했다"고 주장했다.
이번 문서 유출 건도 이런 연장선상에 있다. 전략적유연성 협상이 외교부 내 동맹파에 의해 주도됐고 이종석 차장(현 통일부장관)이 뒤에서 이를 밀어줬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결과에 불만을 품고 문건을 보여줬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