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영(梁銀玲·50·서초구 반포동)씨는 남편과 대학생 아들이 집을 나서면 매일 어디론가 나선다. 월·화요일은 노원구 상계동 적십자 봉사관, 수요일 서초노인복지회관, 목요일 마장동사무소, 금요일에는 다시 적십자봉사관이다. 하는 일도 다양하다. 적십자 봉사관에선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點字) 책을 만들고 노인복지회관에서는 점심을 짓는다. 동사무소에 가면 한의사 봉사단의 도우미로 변신한다.
그녀의 '주5일 근무'는 19년 전 시작됐다. "집안 청소를 하다가 라디오에서 '적십자사가 점자 교육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들었어요. 아이가 막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할 때여서 시간이 있었어요."
교육을 마친 후 처음 시작한 일이 글자를 시각 장애인이 읽을 수 있도록 점자로 바꾸는 일이었다. 처음 타자를 배울 때는 손 마디며 어깨가 쑤시는 통에 집에 돌아와선 벌렁 드러눕기 일쑤였다.
책 한 권을 점자화하는데 보통 1주일이 걸린다. "별별 책을 다 번역하는데 책의 모든 구절구절을 치기 때문에 공부도 되고 좋죠."
그간 양씨가 점역한 책은 400권. 양씨가 꺼내 보여주는 수첩 3권에는 그간 점자로 만든 책들의 목록이 빽빽이 적혀 있다. '종합 침구학 문제' '한의학개론' '황제내경' '중1도덕 자습서' '가정·기술 자습서' '애니콜 사용설명서' '기도의 능력'…. 틈날 때마다 1200쪽 분량의 '동의학 사전'을 점역해 3년 만에 40권의 점자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양씨의 단골인 시각장애인 박희송(54)씨는 "마음껏 책을 읽게 해주는 양 선생님은 제 '눈'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재작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시각장애인 최민석(23)씨도 양씨가 점자로 만들어준 헌법 교과서로 공부한다.
양씨의 수첩에는 점자 번역을 시작한 1988년부터 매일 봉사한 시간이 기록돼 있다. 총 시간이 1만9000시간을 넘었다. 19년 동안 하루 평균 3시간씩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