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이후 16~60세의 양인(良人) 장정은 16개월에 군포(軍布) 두 필(疋)을 내는 것으로 병역을 대신했다. 그런데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에서 면제된 데다 국가에서 임진왜란 전비(戰費) 마련을 위해 납속책(納粟策)과 공명첩(空名帖)을 남발해 양반의 수효가 증가하면서 가난한 백성의 부담만 가중되었다. 영조 때 홍계희(洪啓禧)는 삼남(三南)·강원·황해의 134만 민호(民戶)가 부담해야 할 군포가 실제로는 "물려받은 재산도, 땅도 없어 모두 남의 땅을 병작(?作)해야 하는 처지"의 10만호가 부담한다고 상소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각종 개혁론이 등장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양반도 포를 내는 호포법(戶布法)이었으나 양반 사대부들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영조는 재위 26년(1750) 5월 홍화문(弘化門)에 나가 일반 백성에게서 군역의 고통에 대해 직접 들은 후 "호(戶)가 있으면 역(役)이 있는 것이 상례"라며, "내가 만일 잠저(潛邸·즉위 전에 살던 사저)에 있다면 나도 의당 호전(戶錢)을 내야 하는 것"이라고 반론을 폈으나 현실의 벽을 못 넘고 절충안으로 물러섰다. 양반은 여전히 면제된 채 16개월에 2필 내던 양인의 군포만 12개월에 1필 내는 균역법(均役法)으로 타협한 것이다.
세수(稅收) 부족분은 왕족의 수입이었던 어염선세(魚鹽船稅)와 토지 1결(結)에 쌀 2두(斗)씩을 부과하는 결미(結米) 등으로 메웠다. 왕족과 지주의 부분적 양보로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켰다는 의의가 있으나 이런 감세안(減稅案)으로는 군정(軍政)의 폐단이 해소되지 않았다. 결국 120여 년 후인 고종 8년(1871) 대원군이 등장하면서 뒤늦게 호포법을 실시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받았으나 조선의 국방은 이미 엉망이 된 뒤였다.
균역법과 호포법의 역사는 정책의 실패를 세금으로 메우려는 현재의 증세론(增稅論)이나 이에 대한 즉자적 반발인 감세론처럼 눈앞의 현실적 이해에 집착하는 정파적 시각을 뛰어넘어 현실을 직시하되 우리 사회의 발전된 미래를 건설하는 수단으로 조세 문제에 접근해야 함을 말해준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