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어떨지 궁금해서 못참겠더라구요."

황윤하씨(42세서울 역삼동)는 지난 17일 아내와 함께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연극 '이(爾)'를 관람했다. 영화 '왕의 남자'를 보고난 뒤 원작 연극이 있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한 것. 황씨는 "오랜만에 연극을 보았다"며 "영화와는 또다른 감흥과 매력이 가득하다"고 말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왕의 남자'가 흥행 태풍을 일으키면서 원작인 연극 '이(爾)'(김태웅 작, 연출)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왕의 남자'는 '이'가 원작이라 기본 동선은 비슷하지만 내용은 약간 다르다. 무엇보다 연극은 주인공이 공길이지만 영화는 장생이다. 이는 연출가의 개성차일 수도 있고, 영화와 연극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극대화시키려는 시도의 결과일 수도 있다.

연극 '이(爾·왼쪽)'와 영화 '왕의 남자'의 포스터. 그런데 뭐가 다를까요? (정답은 기사 끝에)

● 이(爾)=왕의 남자
동일인물 공길 지칭…제목 같은 뜻
'정치적 황태자' '은밀男' 연상시켜

'이(爾)'는 조선시대 때 왕이 신하를 높여 부르던 호칭이다. 연극에서 연산이 총애하는 광대 공길을 부르는 말이다. 즉 '이'는 공길이고, 공길은 다름아닌 '왕의 남자'다. 따라서 연극과 영화의 제목은 같은 뜻이다.

동일인을 뜻하지만 어감은 180도 다르다. 이런 차이는 공길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연극과 영화의 비중과 시각차를 드러낸다. '이(爾)'라는 호칭은 공길이 왕의 인정을 받는 정치적 '황태자'라는 의미가 강하다. 공길에 대한 예우가 느껴진다. 반면 '왕의 남자'는 다분히 연산과의 은밀한 관계를 연상시킨다. 이 작품에 팽팽한 긴장과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동성애 코드를 드러낸다.

● 삼각관계…스토리 전개
연극, 중심축 공길의 연적은 녹수
영화, 장생 주도권 잡고 권력 야망

이 작품은 두가지 삼각 관계가 얽혀있다. 하나는 연산을 축으로 한 공길-녹수의 삼각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공길을 가운데 둔 장생-연산의 그것이다.

절대 권력을 등에 업고 권력화되어가는 공길에 초점을 맞춘 연극은 앞의 삼각 관계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천한 신분에서 벗어나 강한 힘을 얻기를 원하는 공길은 왕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고, 한편으론 광대들을 조직화해 권부대신을 몰락시키는 음모를 꾸미기까지 한다. 동성애는 공길이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쯤으로 해석된다.

나머지 인물들은 공길을 중심으로 배치된다. 연산은 사화 후 허무에 찌들어있는 왕, 녹수는 질투의 화신, 장생은 공길의 타락을 안타까워하는 친구이다.

반면 이준익 감독은 첫 장면에서 밤에 양반집 안방으로 불려가는 공길을 보며 괴로워하는 장생을 보여준다. 장차 장생이 공길을 놓고(?) 연산과 벌일 신경전을 암시하고 있다.

공길에 애틋한 감정을 느끼는 장생은 "왕을 갖고 놀아보자"며 동료 광대들을 규합하는 배짱의 사나이다. 마지막 순간 사랑을 잃은 장생이 궁에서 줄타기를 하며 연산을 희롱하는 장면은 소시민들의 막힌 가슴을 뻥 뚫어준다. 절대 권력에 도전하는 장생의 모습은 연극에선 살짝 등장하지만 영화에선 주 테마로 상승한다. 이런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는 동성애의 미학을 상쇄하며 균형을 잡는 작용을 한다. 장생이 주인공을 맡다보니 그의 '연적'인 연산군의 비중도 높아진다. 강력한 신료들에 둘러싸여 "내가 왕 맞아?"를 되뇌는 연산의 모습은 다분히 인간적이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영화속 공길은 연극과 같은 주도권은 잃는 대신 화려한 비주얼 이미지를 확보한다. 이준기라는 배우가 지닌 묘한 중성적 매력과 결합해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킨다.

● "인생은 한바탕 놀이"
등장인물들 대사 반복…공통 주제
공길 '자살' 연산 '피의 복수'로 접근

"사는 건 한판 놀이여. 기쁨도 있고 아픔도 있는…."

공길과 장생, 그리고 광대들을 통해 반복되는 이 말은 연극과 영화의 공통 주제다. 하지만 인물들의 포석과 배치가 다른 만큼 다른 방식으로 변주된다.

연극은 몸까지 던져가며(?) 권력을 쫓던 공길이 나중에 장생으로 인해 참된 광대의 삶을 깨닫고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장면을 통해 주제를 전달한다. 왕이 죽은 공길을 용포로 덮어주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하지만 영화는 '왕을 갖고 놀아보자'로 시작해 왕과 '맞짱'까지 뜨는 장생의 배포와 아픔을 통해, 그리고 자괴감을 느끼다 피의 복수를 감행하는 연산을 통해 광대건 왕이건 인생이 쉽지 않다는 패러독스를 보여준다.

● 10월엔 뮤지컬로도 본다
희곡집도 불티…'왕의 남자' 거센 후폭풍
★ 에필로그

연극에서 장녹수의 내관으로 등장하는 정석용과 장생으로 나오는 이승훈은 영화에서 광대 칠득과 팔복으로 나온다. 감독의 원작에 대한 존경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광대와 왕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는 중요한 조역인 처선은 연극엔 등장하지 않는다. 공길에 카리스마를 모아준 까닭이다.

지난해 봄 영화 판권을 상의하러 온 이준익 감독에게 김태웅 연출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보라고 했다. 니체가 누구인가. 기존 체제와 낡은 틀을 거부하라고 절규했던 인물이 아니던가. 이감독은 어쩌면 절망의 순간에 줄타기 놀이를 감행한 장생을 통해 김태웅 연출의 주문을 성실하게 이행했는지 모른다.

(스포츠조선 김형중 기자)

[정답] 극의 비중을 반영해 영화 포스터엔 장생이, 연극 포스터엔 녹수가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