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의 뒤끝은 얼얼했다. 재인은 눈꺼풀을 몇 차례 깜빡이더니 곧 내 등짝을 세게 후려쳤다. "나쁜 기집애." 그리고 벅찬 음성으로 소리쳤다. "너 되게 멋있다!"
유레카를 외치며 벌거벗은 채 욕탕을 뛰어나왔다는 전설의 과학자처럼 그녀는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다는 기쁨으로 한껏 고양되었다.
"그래. 너처럼 이럴 수도 있는 건데, 그것도 모르고 나는 왜 바보처럼 살았던 거니?"
재인은 자기가 알게 된 기념으로 근사한 곳에 가서 축하주를 마셔야 한다고 우겨댔다. 왠지 재인과 태오를 한 공간에 두고 싶지 않았지만 고집 부리는 재인을 따라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강북강변로변의 고층 카페로 갔다.
보그 최신호를 넘기듯 우아한 자세로 메뉴를 훑어 내리는 재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지갑 속에 신용카드를 잘 챙겨왔던가를 헤아렸다. 그녀가 지목한 와인은 한 병에 7만 원이 넘는 것이었다. 안주로 주문한 모듬치즈 가격까지 합하면 10만 원에 육박할 액수였다.
재인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친구다. 우리는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다. 서로의 틴에이저 시절과 질풍노도의 이십대를 거쳐 삼십대의 나날들을 나란히 통과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는 간절히 염원한다. 태오가 내 친구 때문에 불편하지 않기를. 악의 없을지라도 내 친구가 태오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질문 같은 것은 던지지 않기를. 그것이 그에 대한 나의 사랑 때문인지 아니면 나 스스로를 지키고 싶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똑똑히 말할 거야. 전부 없었던 일로 하자고."
모호한 희망의 힘으로 부풀어 오른 탓일까, 재인은 전에 없이 포도주 두어 잔에 해롱댔다.
"여기서 때려치우자고 하면 그 인간 뒤로 나자빠질지도 몰라. 아니면 나한테 싹싹 빌면서 제발 식만 올려달라고 애원할지도 모르지. 왜? 쪽팔리니까. 그 인간 평생 한 번도 남 앞에서 창피한 일 안 겪어봤잖니. 여기서 파토 나면 아마 이민가 버릴걸. 아유, 고소해."
"야, 애들 장난도 아니고. 조금만 더 잘 생각해봐."
차마 '너는 안 쪽팔리겠니?' 라고 핵심을 콕 집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태오가 내 의견에 반박하고 나섰다.
"자꾸 왜 그래요? 생각 더 하면 더 복잡해지기만 해요. 하루라도 빨리 그만둬야죠."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것 같아? 내 맘 내키는 대로 '여러분 미안, 이제 여기서 끝!' 이럴 수 있는 건 줄 아느냐고. 일이 얽히고설켜 감당하기 어렵게 커졌더라도 실타래 풀 생각을 먼저 해야지. 괜히 도망가라고 했다가 나중에 얘 인생 더 꼬이면 자기가 책임질래?"
"야, 싸우지 마. 왜 나 땜에 싸워. 재인이, 갈래."
제 이름을 유치원생처럼 칭하며 재인이 비틀비틀 일어섰다. 나는 번개처럼 카운터로 달려 나가 계산을 치렀다. 재인을 택시 뒷자리에 밀어 넣고 나자, 찬바람 부는 골목 안에 우리 둘만 남겨졌다.
"왜 그랬어요? 자기 친구 처음 보는데 당연히 내가 내야지."
불콰한 뺨을 한 채 태오가 언성을 높였다. 그가 화내는 모습은 처음이다. "네가 주저하는 모습은 차마 보고 싶지 않았어." 아니, 나는 그만큼 솔직하지 못하다. 기껏해야 고개를 떨어뜨리고 "미안해" 라고 대꾸할 뿐이다.
2층 복도에서 옆집 여자와 마주쳤다. 서먹하게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각자 제집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득, 이런 때엔 나도 혼자 문을 따고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의 방이란 무엇일까. 시골마을에서는 이웃에 가려면 언덕을 넘고 개울을 건너야 한다.
그러나 도시의 방과 방 사이, 집과 집 사이는 다닥다닥 붙어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타인과의 물리적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불편하다며 늘 투덜거리곤 한다. 타인과 가까이 있어 더 외로운 느낌을 아느냐고 강변한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언제나 나를 외롭지 않게 만들어줄 나만의 사람, 여기 내가 있음을 알아봐주고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러줄 사람을 갈구한다. 사랑은 종종 그렇게 시작된다. 그가 내 곁에 온 순간 새로운 고독이 시작되는 그 지독한 아이러니도 모르고서 말이다.
컴퓨터의자에 앉은 태오의 등은 완강하고 딱딱해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투룸을 얻는 건데.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에 걸터앉자, 이제 오롯한 내 공간은 여기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옆집 화장실의 물 내리는 소리가 평소보다 커다랗게 들려왔다. 도시의 방들은, 가늠할 수 없는 거리 위에 위태로이 서 있다.
((3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