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력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영·미식 모델, 사회 통합을 우선시하는 대륙식 모델. 어느 한쪽 모델만 ‘정답’이라고 생각한다면 유럽을 들여다보시길. 친(親)기업 노선의 아일랜드는 흔히 영·미식 모델로만 알려져 있지만, 아일랜드가 고속성장을 질주한 것은 사회 집단의 대타협이라는 대륙식 요소를 접목한 덕이었다. 반면 대륙식 모델의 대표적 나라인 네덜란드·독일은 사회보장 지출을 줄이는 등 영·미식 경쟁력 강화 해법에 전력을 기울이고 나왔다. 국가 이익 극대화라는 목표 아래 두 모델은 수렴하고 혼합된다. 유럽에선 지금 상대방을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하는 사회 모델의 &+(창조적 공존) 실험이 한창이다.
◆독일·네덜란드의 영·미식 수술
"10년 안에 독일을 유럽에서 성장률이 가장 높은 3개국 중 하나로 만든다."
작년 11월 취임한 '철의 여인'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총리는 연립정부 출범 일성으로 국가 경쟁력 강화를 내세웠다. 원래 '경쟁력' 개념은 영·미식 모델의 전공이다. 그는 올해 신년사에서도 "경제 성장만이 독일의 복지사회를 가능케 한다"며 친(親)기업 노선을 다시 확인했다.
메르켈의 개혁은 노동시장 경직성을 완화하는 고용 개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신규 채용 때의 인턴 기간을 6개월에서 2년으로 연장, 이 기간 중에는 언제든지 해고가 가능하게 했다. 또 기업의 사회보장비 부담 경감, 법인세 인하 등 영·미식 친기업 정책을 들고 나왔다.
메르켈이 우파 기민당 소속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전임(前任) 슈뢰더의 사민당 정권도 해고요건 완화, 실업수당·연금보험 축소 등의 이른바 '아젠다 2010'을 추진해왔다. 독일의 저성장·고실업병(病)을 치유하려면 영·미식 개혁밖에 없다는 사회 공감대가 쌓인 것이다.
북유럽의 강소국(强小國) 네덜란드. 전통적으로 대륙식 사회통합을 중요시해 온 이 나라에서도 영미식 개혁 수술이 한창이다. 지난 2002년 사민당 주도 연정을 누르고 집권한 발케넨데(Jan Peter Balkenende) 총리가 임금인상 억제와 정부지출·사회보장 축소 등을 강하게 밀어붙인 것이다.
한스 슬롬프 라드바우트 대학 교수는 "임금 문제 등 주요 사회경제 정책에 대해 노동계와 경영계의 자율적 협약을 존중해오던 네덜란드에서 이 같은 정부 주도의 개혁조치는 상당히 예외적"이라고 말했다.
노조 반발은 거셌다. 2004년 10월 암스테르담 뮤지엄 광장에는 30여만 노동자가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다음달 네덜란드 노·사·정은 임금을 동결하는 대신 양육 지원을 강화한다는 등의 타협안에 합의했다.
헤이그에서 만난 기독교노동연맹(CNV) 간부 헤릿 프라임씨는 "당시 논의 과정에 노조를 배제했기 때문에 시위를 한 것이지, 경쟁력 강화 자체를 반대했던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경제침체로 전체 파이(나눠 먹을 몫)가 쪼그라드는 상황에서 네덜란드 노조도 경쟁력이라는 영·미식 화두(話頭)를 기꺼이 수용한 것이다.
◆아일랜드의 대륙식 사회협약
이번엔 아일랜드. 고속성장에 성공한 아일랜드의 비결을 영·미식 친기업 정책 때문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오해다. 더블린에서 만난 노조단체 아미쿠스(AMICUS) 간부 노이린 그린씨는 "(대륙식) 사회협약을 통해 노·사 동반자 관계를 이루었기 때문에 외국기업이 마음 놓고 투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아일랜드는 파산 직전 상태였다. GNP의 1.2배가 넘는 재정적자에 시달렸고, 실업률은 18%로 유럽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가 없어 영국이나 호주로 이민 가는 젊은이들이 허다했다.
아일랜드 기업·경영자연맹(IBEC) 리암 도허티 노사국장은 "정부와 기업, 노동자, 사회 단체 모두 무언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국가 경제가 파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동의했다"고 말했다.
위기는 합의를 낳았다. 아일랜드 노·사·정은 1987년 대륙식 사회협약인 '국가재건 프로그램'에 합의하는 데 성공했다. 노조가 임금인상 억제에 동의하는 대신, 기업은 고용 유지와 일자리 확대를 약속하고, 정부는 세금 인하로 노동자들의 실질소득 증가를 돕는 골격이다.
낮은 법인세(12.5%)와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기업 지원 같은 친기업 정책에다 이런 사회협약이 뒷받침되자 아일랜드는 기업의 천국(天國)으로 변했다. 마이크로소프트·IBM·델·인텔·화이자 등이 속속 아일랜드에 투자했고, 지금은 다국적 기업 1100여곳이 들어와 활발하게 기업활동을 벌이고 있다.
1987년 첫 협약 이후 최근의 '지속적인 진보 2003~2005'에 이르기까지 아일랜드는 6차례 사회협약을 새로 체결하면서 통합의 토양을 다져왔다. 노·사·정뿐 아니라, 농민·지역사회·실업자단체·장애인단체 등 다양한 사회 집단이 참여, 사회통합을 시도한다는 점이 색다르다. 안건은 당초 임금 협상 위주였으나 건강·교육·복지·양육 등 사회·경제정책까지 확대됐다.
야당인 노동당의 콤 오레돈 정책국장은 "사회 동반자 관계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모두가 이익을 보는 시스템"이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단, 모든 당사자들이 타협할 준비가 돼 있어야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